나는 오늘을, 너는 내일을 -엄마의 두 번째 편지
어린이집 2학기 상담을 끝내고 나오면서 엄마는 웃음이 피식 났다. 우리 이도는 흠잡을 데 없는 완전한 원생이더구나. 놀이도 제일 적극적이고 밥도 가리는 것 없이 잘 먹고 정리정돈에 양치와 옷 입고 벗는 것까지 스스로 하며 선생님들께 애교 있고 친구들에게 다정한, 아주 잘하는 아이라는 종종 선생님으로부터 듣던 칭찬을 다시 한번 듣고 나오면서 집에서는 떼쓰고 운다는 것을 까발린데다 좋지 않은 버릇의 근원을 캐려고 선생님과 마주 앉았던 엄마가 참 무색해졌다. 그리고 너의 그 이중생활이 꽤 대견하게 생각되어 웃음이 났어.
"녀석 참 귀엽단 말이야~"
하면서 엄마는 '사회성'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네가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한 게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네. 놀랍지? 14개월부터 다닌 어린이집을 어느새 이렇게 훌륭하게 적응하고 잘해나가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이도는 타고난 사회성이 있는 걸까. 그 어린 나이에 집과 다른 단체생활을 어떻게 그렇게 잘 구분지어서 그 규칙에 따라 적극적이고도 주체적으로 생활할까. 물론 이도는 집에서 엄마가 만든 규칙들도 꽤 잘 따르지. 너는 아마 순한 기질의 아이인가 보다. 그 눈치 빠르고 착한 심성으로 너의 주변을 잘 돌아보는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겠지.
너에게 처음으로 시련을 안긴 사람이 있다. 사촌인 세영이 형. 두 살 위인-그래 봤자 5살이다- 세영이 형이 무서워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빙 둘러 다니는 너였는데 어쩌다 근처에 서 있다가 형이 "저리 가"하며 밀쳤지. 그때 깜짝 놀라 무서워하면서 울던 네가 생각난다. 너한텐 그야말로 시련이었을게다. 태어나서 너를 그런 식으로 대한 사람은 처음이니까. 알아서 세영이 물건은 안 만지고 어쩌다 몰라서 만졌다가도 임자가 나타나자 놀라서 얼른 돌려주던 것은 할머니가 자주 말씀하시는 에피소드지. 네가 두 돌도 되기 전의 일이야. 지금은 그 세영이가 돌변하여 이도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 알지? 둘도 없는 너의 형이고 앞으로 너희 둘은 각별한 사이가 될 거다.
네가 유치원을 가고 초등학교, 중학교 또. 더 올라갈수록 또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수록 너는 정말 많은 종류의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스쳐가는 인연, 만남 당시 깊어졌다 다시 소원해져 버리는 관계, 깊진 않지만 길게 종종 만나는 사이, 가끔 봐도 늘 동일한 느낌의 만남, 항상 내 옆에 있는 사람, 수많은 관계와 만남에서 너는 아기 때의 첫 시련과 비교조차 안 되는 시련들을 겪게 되겠지. 사람이 살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시련 중에 거의 다가 사람과의 관계 때문이야. 따지고 보면 그렇다. 상대의 말과 행동과 반응에 내 마음이 얼마나 좌우지되는지 알아채면 어이가 없을 정도니. 무시해 버리면, 그만 관계를 끊어내 버리면 그만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해 버리자 쳐도, 상대가 남긴 그 여운을 나에게서 떨쳐내기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지.
엄마가 대학교 때 교양과목 하나를 들었어. 연극영화과의 한 이론과목이었는데 내가 미대생인지 알았던 교수가 나에게 원근법은 발견한 것이냐 개발한 것이냐를 물었다. 나는 개발이라고 대답했고 교수는 발견이라고 가볍게 대꾸했지. 엄마는 그것이 아직도 기법의 개발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랬는데 교수의 말 끝에 내 앞에 앉은 한 남학생이 나를 아주 무시하는 표정으로 돌아봤다. 그런 것도 몰라? 하는 경멸의 눈으로. 나는 너무 불쾌하여 "야 왜 그런 눈으로 봐! 너는 다 아냐?"라고 쏴대고 싶었지만 참았지. 그 시간 내내 분노에 부르르 떨면서 그 학생 뒤통수를 갈기고 싶었지만 참아냈다. 그런데 아니? 그 남학생의 눈이 이따금씩 와서 박히는 거야. 불쑥불쑥 그 불쾌감이 솟구칠 때가 있는 거야. 그날 그 학생은 왜 나를 그런 식으로 대했을까.
짐작 건데, 그는 아마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도 모를 거야. 아니 어쩌면 99.99프로 그런 일 정도는 그의 기억에 없는,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스쳐간 순간이겠지. 그러나 그 여운이 나에게는 오래 미치지 않았니.
아주 작은 사건이 심지어 모르는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 너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말해주려다 보니 이런 예시를 들게 됐지만 이도야, 가까운 사이에서 입는 마음의 상처는 훨씬 더 깊어질 수 있다.
너는 배신, 실망, 원망, 서운함 등의 감정을 헤아릴 수 없이 겪어내며 살아가겠지. 네가 받게 될 상처에 엄마는 벌써부터 마음이 아프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리고 잘 대처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란다.
반대로 부지불식간이든 어쩌다 고의로 그렇든 네가 타인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겠지. 후자의 경우엔 결국 너에게도 상처가 될 거지만. 눈빛 하나도 몸짓 하나도 말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타인에게 행하는 것엔 늘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 누구를 함부로 대할 권리는 너에게도 나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없어.
이도야, 솔직히 고백할게. 엄마는 사람이 좋지 않았다. 되도록 안 부딪치고 싶어 했고 사람을 피해 산에 사는 사람을 이해한다 생각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임을 이제는 알아. 너는 되도록 많은 사람과 부대끼며 많은 사람 속에서 살았으면 좋겠어. 사람 사는 의미를 찾으러 사람을 피해 혼자서 산으로 가는 구도자보다는 사람에게 밥 해주는 봉사를 하는 '사람이 너무 좋다' 말씀하시며 사람 좋은 웃음을 흠뻑 웃는 아주머니가 솔직히 더 위대하게 느껴진다.
네가 사람의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났으므로 사람과 부대끼고 살아야 함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야, 그렇지?
네가 아기 때부터 가진 사회성은, 규칙을 잘 지키고 다정한 성격은 더불어 살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사람인(人)은 두 개의 획이 서로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듯한 모습이야. 한자는 형상을 본떠서 만든 글자이지.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듯한 모습이 바로 사람인 우리가 사람을 정의하는 말이다. 사람의 세상에 혼자서는 살 수는 없는 법이야. 서로 기대어 사는 것이 사람 사이(人間)를 또한 정의하는 말일 수 있지 않을까.
사람 간 직접 접촉이 사라지는 사회에서도 꼭 만나야 할 사람끼리는 만나고 사람인의 의미를 실천하면서 사는 삶이 위대하고 유요한 가치임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니.
그러니 이도야, 너를 둘러싼 사람들과 그들이 또 네가 속한 이 사람의 세상에 관심을 가져라. 지켜봐야 해. 감시의 대상은 감시의 시선으로 보살핌의 대상은 보살핌의 시선으로 관심을 게을리 말고 지켜봐야 해.
그리고 타인에게 친절해라. 이것 하나만으로 사람에 관한 너의 고민이 대부분 희석될 수 있고 너의 삶이 전반적으로 괜찮아질 것이다. 너의 다정함과 친절을 이용하려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그들의 악의에 동화되어 너 자신을 다치게 하지는 마. 그들은 사람의 선의를 그렇게밖에 대하지 못하는 지옥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로부터 너를 지켜낼 것은 다시 마음을 닫는 것이 아니라 결국 네가 견지해 온 세상을 향한 다정함이란 것을 지혜로운 너는 알게 될 거야.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는 엄마도 실은 아주 노력을 하고 있단다. 네가 용기를 주는구나.
엄마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여기까지 왔지만 엄마도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지 않겠니. 엄마의 메시지를 스스로 다짐하고 지켜가는지 네가 옆에서 잘 지켜봐 주렴. 따뜻한 보살핌의 시선으로 말이야.
벌써부터 엄마를 안아주려고 하질 않으니, 참. 덤으로 따뜻한 포옹도 종종 해줬으면 좋겠구나.
너의 온기로 엄마는 점점 더 따뜻해지고 있어. 고맙다, 아가야.
2022. 11. 18. 엄마의 두 번째 편지.
도미노로 이도의 이름을 만든 아빠. 엄마가 찍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