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을, 너는 내일을 -엄마의 세 번째 편지
오늘 산에 갔더니 비로소 '가을이 꺾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의 초입에서 올려다보니 길은 온통 창백한 살구색과 빛바랜 오렌지색의 나뭇잎으로 강을 이루었더구나. 정상에 가까워지자 지난여름 우거진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시풍경이 듬성듬성 드러난 걸 알아채고 지나간 겨울의 산행을 생각했다.
올초 너를 처음 어린이집에 보내고 산행을 시작했을 때 그땐 이미 3월이 다 되었지만 봄은 소원하고 칼바람을 피하려 중무장을 했었지. 서서히 봄은 오더구나. 진달래를 시작으로 갖은 야생 꽃들이 차례로 피어나고 벚꽃이 피었을 땐 과히 환상적이라 할만했다. 윤기 나는 연둣빛 새싹들이 빛을 잃고 진녹색으로 탈바꿈할 때쯤 여름이 시작됐어. 때죽나무의 흰 꽃들이 얼마나 시선을 산란시키는지, 이 산에 이리도 때죽나무가 많았구나... 그 존재를 깊이 각인시켰어. 그 존재감을 무시 못해 이름을 알려고 놔두고 다니던 휴대폰도 그땐 부러 들고 다니면서 '꽃 검색'을 했다. 여기저기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들을 모조리 찍어 이름을 알았지. 그래서 때죽나무도 알았고. 도라지 꽃은 얼마나 예쁘며 뱀딸기의 그 상큼한 붉은색이란... 극심한 더위를 잊을 만큼 산생명의 자태들에 도취되었다. 엄마는 여름꽃은 푸른빛이 많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나름 신기한 발견에 스스로 대견했고 이렇게 많은 꽃과 열매와 식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여름 산이 신기했다. 여름은 한 생애 살아보고자 온갖 미물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계절이란 어느 작가의 말이 깊이 와닿았지.
쨍하게 에너지를 발산하던 여름이 어느새 가고 잎들이 색을 바꾸기 시작하자 가을이 왔다. 가을은 참 산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특유의 청명한 날씨는 기분을 더 고취시키고 생기 돌게 하거든. 문득 하늘을 올려다볼 때 그 짙은 가을빛의 하늘에 색색의 단풍이 빛을 받아 반짝이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최근에 비가 오지 않아서 계속 산에 다니며 가을을 만끽할 수 있었지만 수확철이라 걱정은 되더라고. 전라도 지방은 극심한 가뭄에 시달린단 소식도 있고. 산에 좀 덜 가도 좋으니 비가 좀 와야 할 텐데...
아무튼, 엄마가 푹 빠진 이 산의 풍경에 대한 끝맺음을 하기 전에 계절을 막론하고 산을 돋보이게 하는 것의 정체를 알려줄까? 바로 햇볕이다. 총천연색 나뭇잎에 자연의 빛이 더해지는 순간의 그 찬란함이란! 웅장한 돔의 스테인드 글라스의 영롱함이나 드높은 천장의 샹들리에의 화려함에 결코 지지 않지. 계절과 상관없이 풍광을 돋보이게 하는 일등공신이다. 어서 너에게 보여줄 날이 왔으면!
엄마는 이제 열 달 정도 산에 다녔나 보다. 중도 포기 않고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치유'의 효과를 봤기 때문이야. 갓난쟁이인 너를 돌보면서 엄마는 심신이 아주 피로했어. 흔히들 말하는 산후 우울증을 겪었지. 아마 산후 호르몬의 영향일 거야. 낮잠을 재우고 그 옆에서 술을 마시며 울던 내 모습은 그야말로 하나의 스냅사진이 되어 기억에 박혀있다. 그러고 앉은 내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있었겠니. 너를 일찍 어린이집에 보낸 것도 그런 나를 일으켜 세우고 싶어서다. 물론 엄마는 할머니 옆에 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지. 네 아빠도 육아를 했고. 그러나 사람마다 느끼는 피로도와 고통의 차이는 매우 크단다. 고통에 민감한 사람도 있고 다소 무딘 사람도 있지. 엄마는 말하자면 민감도가 높은 예민한 쪽에 속해. 감수성도 예민하지만 물리적으로 느끼는 고통 또한 크다는 것을 너를 낳으면서 확실히 알았어. 정신 못 차리고 누워있던 엄마는 같이 수술한 다른 산모의 멀쩡함을 보고 정말 아연실색했었다.
엄마는 원인 없는 두통을 달고 살고 근육통이 없는 날이 거의 없어. 이렇듯 육체와 정신이 한꺼번에 예민해 어찌 보면 약간은 불편하지. 그래서 산을 생각했다. 건강해지고 싶었거든. (어쨌든 힘내서 너를 잘 돌봐야 했으니까.) 26년 만에 처음으로 집 뒤의 산을 오르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 여기 26년을 살면서 외면했던 산, 이름도 정겨운 '옥봉산'이다.
엄마는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거나 생각을 정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이제는 산이 간절해진다. 너를 보내고 한 시간 남짓 하는 산행이 이젠 정말 보석 같은 시간이 되었다. 산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나면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고 하루를 또 잘 살아낼 힘이 생긴다. 결국은 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다. 하루하루 공부한 내용들을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정리하고 다짐하는 귀한 시간이다.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고 부정한 생각을 쏟아버리고 온다. 이러면서 엄마는 진심으로 중얼거리지. "자연에서 치유된다."
엄마가 끝까지 옥봉산을 몰랐으면 어땠을까? 너에게 유산으로 글을 남길 생각이 아마 들지 않았겠지.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네가 잘 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깊이 하지 않았겠지. 세상의 법칙들을 알아가고 또 그것들이 놀랍도록 상호 간에 연결이 되며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 법칙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실천할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 그런 건 다 차치하더라도 궁금해지는구나. 산을 안 갔으면 스트레스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이도야, 엄마는 자연의 좋은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고 그걸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10살쯤 됐을까. 방학이면 곧잘 큰집이 있는 상주에 가곤 했는데 그때가 겨울방학이었나 보지. 눈이 많이 내렸다. (너도 알지, 우리가 사는 부산은 눈이 거의 안 온다고 봐야 되잖니.) 옛날 시골집의 온돌방에 앉아 격자무늬에 창호지를 바른 옛날식의 나무문을 열어 놓고 밖을 보고 있었어. (따뜻한 방바닥과 바깥의 시린 추위의 극명한 차이가 지금도 느껴지는 듯하다.) 정말 그때의 내 주먹만 하게 느껴지는 눈이 하늘에서 펑펑 내리는데 이미 온통 하얗게 변한 그 세상에 그야말로 펑펑 쏟아지던 눈을 그 황홀한 장면을 엄마는 절대 잊을 수 없다. 더럽다고 피하던 마당의 소똥도 짚단도 지붕도 담장도 하얗고 하얗게 덮이고, 그 너머 멀리 희뿌옇게 아슴하던 논도 길도 산도 온통 하얗게 시야 촘촘히 내리던 그 눈을 생각하면 언제나 눈물이 난다. 어떻게 하늘에서 저런 게 쏟아질까, 어린 가슴속으로 삼킨 놀라움은 분명 처음 느낀 자연의 경이로움! 이렇게 자연은 마음에 감동을 주고 여운은 오래도록 남아 감수성에 영향을 주는가 봐. 풍부한 감수성은 이해를 낳고 사람과 세상을 이해할, 공감할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결국 자연의 일부이니까 말이야.
너는 아마도 자연으로 많이 다닐게 될 거야. 엄마는 너를 키즈카페나 실내 동물원으로 쇼핑몰로 데려가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지금도 아빠가 좋아하는 바다나 엄마가 좋아하는 산에 주로 다니잖아. 엄마의 취향이 반영되어 엄마 아빠는 데이트를 절 주변에서 종종 했어. 부처님 계시는 절 말이야. 우습니? 지난 토요일에도 마지막 단풍을 보러 범어사에 갔잖아. 그전 주에는 석남사를 갔었고. 이쯤 되면 절 마니아라 해도 되나? 후후.
잠든 너를 차에 두고 엄마는 발길 뜸한 절 주변을 홀로 산책했는데 정말 좋은 시간이었어. 하늘에 촘촘히 박힌 각색의 단풍은 절경이더구나. 너도 자연이 주는 이 경이로움을 알아채고 즐기는 감수성이 생기겠지. 자연을 찾아 평온을 느끼고 휴식하겠지. 그러니 자연을 너의 일부로 느끼고 의지해야 한다. 또 아껴야 한다. 자연은 언제나 그 이상을 내주니까.
엄마는 소위 대자연이라는 것을 본 경험은 없다. 스위스의 설경이나 나이아가라 폭포, 깎아지른 절벽과 끝없는 사막, 또 밤하늘의 오로라 같은 것을 보는 경험을 하게 되면 저절로 눈물이 나면서 인간 존재의 미약함과 하찮음을 깨닫게 된다고들 하지. 그런 대자연과 견주면 인간은 아까 말한 여름 한생 살고 마는 미물로 느껴진다는 걸 거야. 그 거대한 힘 앞에 절로 겸손해지는 거겠지. 그렇게 압도되는 기분은 어떨까, 정말 궁금하지 않니? 결코 기분 나쁜 쪽은 아닐 거야. 오히려 그 반대겠지. 그 굉장한 기운을 살면서 한 번은 경험해보고 싶네. 대 자 연이라... 생각만 해도 가슴 뛴다.
엄마는 가끔 언젠가 너와 함께 산에 갈 날을 상상하며 설레어한다. 우리 이도가 몇 살 때쯤이면 같이 갈 수 있을까? 종종 가늠해 보는데 그날을 우선 기다려 보기로 하자. 우리가 마음 맞아 대자연을 찾아 떠날 일은 그다음으로 미루자. 일단 옥봉산부터 가보자, 좋지?
2022. 11. 25. 엄마의 세 번째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