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베테랑 2 볼 운명이 아닌 부부

by 다몽 박작까


"베테랑 2 개봉했대. 보러 가자."


남편이 이 말을 처음 꺼낸 건 개봉 일주일 전. 그 후로 그는 거의 매일 한 번씩 이 말을 했다. 드라마도 아니고 일일영화 베테랑 2의 시작이었다. 사실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도 싫어하는 편도 아니다. 딱히 누가 보자고 하면 보긴 하지만, '베테랑 2'는 내 취향도 아니었다. 게다가 요즘 벌려 놓은 일들이 워낙 많아 영화 따위에 내 에너지와 시간을 쓰는 건 왠지 인생의 손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내 입장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인스타그램에 친구가 인증샷 하나 올렸다 하면

"나만 안 봤어. 누구 때문에 못 봤는지 내가 말 안 안해도 알겠지?"라며 삐짐을 가열차게 표출했다. 심지어는 "영화 한 편 보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냐."며 나를 전우처럼 바라보기도 했다. 전우라기 보단 적군 쪽이었지만.


결국, 그의 감정은 삐침을 지나 거절과 분노와 냉전 사이 어딘가로 흘렀다. 나는 영화 티켓보다 화해가 급한 상황이 되어 "영화 보자... 미안해..." 했다. 그제야 그는 "됐어."라며 투명한 회피 태클을 날렸다.


한동안 흐지부지 했던 사이는 다시 가까스로 평화를 되찾고 드디어 애들을 재우고 심야 영화로 베테랑 2를 보기로 했다. 내심 미안했던 나는 '그래 오늘은 봐야지. 진짜 이건 내가 갚아야 할 빚이야...'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예매했다.


그런데 영화는 결국 취소했다. '이건 데스티니인가.' 이번에는 아이가 발목을 잡는다. 심야 영화보다 열나는 아이가 더 강했다. 둘째가 갑자기 열이 오르기 시작한 거다. 평소 고장도 안 나는 복사기가 갑자기 멈추듯. 맨날 튼튼하던 애가 갑자기 몸이 후끈. 그날의 '베테랑 2'는 그렇게 또 날아갔다. 다음엔 그냥 넷플릭스에서 보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러던 중 하늘이 우리 부부에게 드디어 기회를 줬다. 아이들이 고모네 집에서 자고 싶다고 한 것이다. 하늘이시여. 저희도 가끔 부부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오랜만에 진짜 데이트를 했다. '역전 할머니'에서 라볶이에 짜파구리와 생맥 하나를 툭 얹어 마셨다. 밤공기 속을 산책하며 인생이란 이런 것이구나 했다. 남편의 심야 영화 사랑을 존중해 밤 11시 5분으로 예매. 영화 시작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아 괜히 인형도 하나 뽑고 따뜻한 차도 마셨다. 우리가 꽤 괜찮은 커플 같다며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화장실만 다녀오면 영화관 입장.



... 그 순간 전화가 왔다. 그 전화는 마치 흑역사처럼 찝찝하게 우리를 다시 현실로 소환했다.



"지금 여탕에서 손님 한분이 신발장이 안 열려 못 나가고 계세요. 마스터키도 안 먹혀요. 손님이 화내고 난리 났어요."


...영화 보기 딱 5분 전이었다. 이 타이밍 무엇? 누가 쓰디쓴 드라마 대본이라도 쓴 건가? 우리는 차 없이 산책 와 있었고 택시도 안 잡히는 동네였다. 영화는 환불도 안 되는 할인 없는 정가 28,000원이었고 무엇보다 남편은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세 번째 기회를 기다렸던 사람이었다.


"이럴 거면 넷플릭스 보지 그랬냐?"는 말은 영화보다 액션이 심해질까 봐 조용히 삼켰다. 그냥 뛰었다. 영화관까지 걸어왔던 30분 거리를 15분 만에 역주행. 달리면서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화나 볼 걸.


정작 가게에 도착했을 땐 손님은 이미 직원용 슬리퍼를 신고 나가셨다. 화는 날 만했다. 운동화를 못 신고 집에 가는 것도 서러운데 신발장 하나 안 열려서 15분을 갇혀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나는 그걸 해결하겠다고 이 밤중에 체력을 털었지만) 문제의 신발장은 하필이면 맨 꼭대기였다. 작은 사다리를 꺼내 올라가 비장의 마스터키로 열어보는데... 안 열린다. 남편이 와서 열어봐도 안 열린다. 결국 신발장을 뜯었다. 그랬더니 왕리본 달린 운동화 끈이 신발장 걸이에 걸려 있었다. 범인은 왕리본. 이 모든 사달의 주인공은 귀엽고 풍성한 리본 하나였다.


손님께 전화 드려 사실을 말씀드렸다. 운동화 끈 때문이었다고. 그제야 손님의 목소리도 조금 누구러졌다.

"아... 제가 잘못 넣었나 봐요."


그렇다. 인생은 다 그런 거다. 신발장이 안 열리는 이유는 대체로 왕리본이나 신발을 제대로 넣지 않아서 그런 경우가 많다. 멀리서 오신 손님이라 직접 드릴 수도 없어 다음 날 우체국 가서 퀵으로 보냈다. 나름 신속했따. 내 심박수만큼이나.






그날 이후, '베테랑 2'는 이제 우리 부부의 평생 과제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못 보면 진짜 이건 전생에 영화관을 폭파한 죄가 있는 거 아닌가? 그러다 며칠 전, 다섯 번째 시도 만에 드디어 봤다. 진짜 영화보도 감동적인 영화 관람이었다. 전율마저 느껴졌다. 심지어 오프닝 크레딧에서 눈물 날 뻔했다. (물론 영화 내용과는 무관한 감정이었다.)


이제는 생각한다. 남편이 다음에 또 취향 안 맞는 영화 보자고 해도 무조건 보겠다고 하자. 왜냐면 우리는 언제 또 신발장에 갇힐지. 하수구가 터질지. 혹은 왕리본이 발목을 잡을지 예측 불가능한 자영업 부부니까.


우리에겐 그냥 영화 한 편이 아니다. 그건 자유와 평화와 고요함에 대한 아주 조촐한 선언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외친다.


"대한민국 자영업자 만세!"


그리고 베테랑 2 고마워. 드디어 봤어.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