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물건은?
찜질방 카운터에서 전화가 왔다.
직원 : "지금 여탕에 도난 사건 생겨서 경찰 불렀데요.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전화를 받자마자 후줄근한 옷을 대충 입고 머리를 질끈 묶었다. 상황이 심각한 것 같아 전후 사정 들어보지 않고 찜질방으로 달려갔다. 가자마자 카운터 직원에게 물었다.
나 : "무슨 일이에요? 여탕에 어떤 도난 사건이 났다는 거예요?"
직원 : "화장품이래요. "
화장품이라니. 핸드폰이나 지갑, 목걸이 등은 들어봤어도 화장품은 처음이었다. 얼마나 고가의 화장품이길래 경찰에 신고를 했지. 갈색병 에스티로더인가? 샤넬이나 SK II? 리미티드 에디션 한정판? 어떤 브랜드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고가일 것 같았다. 그러니 112에 신고까지 했겠지. 대체 누가 가져간 걸까? 어린 10대? 한창 화장품에 관심 많을 20대?
잃어버려서 얼마나 속상할까. 얼마나 소중하길래.라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신고까지는 좀 오버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귀한 물건을 왜 찜질방에 가져와서 잃어버렸을까. 귀한 건 집에서만 쓰면 안 되나? 원망 섞인 푸념이 나왔다. '화장품'이라는 단어 하나에 오만가지 생각들이 스쳤다. 수많은 생각들이 떠오른 건 부담감 때문이었다. 찜질방에서 잃어버린 물건이니 반드시 주인에게 찾아줘야 된다는 부담감.
경찰이 도착했다. 2명의 남자 경찰이었다.
'오 마이갓. 여탕인데요?'
여탕에서 일어난 일인데 남자 경찰이 오면 어쩌자고요. 손님이 잃어버린 장소는 얘기하지 않았나 보다. 장소가 여탕 안에 탈의실이니 여자 경찰분이 오셔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근처 지구대에는 여자 경찰분이 안 계셔서 다른 지구대에 요청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지체되는 사이 손님은 역정을 냈다.
손님 : "(펄펄 뛰며) 신고한 지가 언젠데 뭐 하는 거예요~~"
사실 잃어버리는 물건을 찾기란 쉽지 않다. 여탕 탈의실이나 탕 내에서 잃어버린 물건은 더욱 그렇다. 옷을 벗거나 입는 공간에 당연히 CCTV가 없지 않은가. 동동거리며 물건을 애타게 찾는 손님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안쓰럽다. 경찰을 부른다고 해서 범인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손님이 그걸 모를 리 없는데 어쩌자고 경찰을 부른 걸까. 어떻게 찾지. 핸드폰처럼 gps로 추적할 수도 없고. 씻고 나가는 손님들의 소지품을 일일이 다 확인할 수도 없고. (그랬다면 진짜 난리 나겠지? ) 절로 고개가 절레절레 되었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까?. 과연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런 일이 있을 땐 참 난감하다. 사실 손님 보다 더 딱한 건 신고했다고 출동한 경찰분들이다. 아무리 도둑 잡는 경찰이라고 해도 찜질방은 힘들다. 드라마에서 보면 경찰이 도둑을 찾을 때 탐문을 하고 주변에 있는 CCTV를 조사하던데. 탈의실은 CCTV가 없는 사각지대. 게다가 설령 도둑을 찾는다 해도 CCTV증거 없이 무슨 수로 도둑을 증명한담. 가방 속 물건들이 한눈에 보이는 공항 검색대처럼 목욕가방 하나하나를 들여다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린아이 물건처럼 이름이 붙어 있을 리 없고. 문제가 해결 가능성이 있든 없든 신고하면 거절 없이 무조건 출동해야 하는 경찰분들의 현실이 안타까워졌다. 경찰분들의 노고에 한없이 짠해진다. (대한민국 경찰 파이팅입니다!)
어찌 됐든 잃어버린 장소가 찜질방이니 경찰분들 대신 내가 찾아주고 싶다. 해결하고 싶어 짱구를 굴리다 보니 별 생각이 다 든다. 명탐정 코난이 되어 현란하게 추리를 할 수 있다면 범인을 추려냈겠지? 시속 300km의 속도로 사람의 4~5배나 멀리 볼 수 있는 예리한 매의 눈을 가졌다면 찾았으려나? 손대는 일마다 큰 성공을 거둔다는 미다스의 손이었다면? 아니야 아니야. 지금은 순식간에 물건을 뿅 하고 찾았으면 좋겠으니까 해리포터처럼 마술 주문을 외워볼까?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 엉뚱한 상상이 이어진다. 그만큼 간절히 잃어버린 물건을 빨리 찾기 바랐다.
다행히 여자 경찰분은 현장에 빨리 오셨다. 그렇게 여자 경찰 분과 함께 현장인 여탕 탈의실로 들어갔다. 손님을 만나 어떤 모양과 색깔의 화장품인지 물어봤다.
나 : "안녕하세요. 여기 실장인데요. 화장품을 잃어버리셨다면서요?"
손님 : "범인 알아요."
다짜고짜 범인을 안다는 손님의 말에 황당해하며 대체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손님 : "청소 아줌마가 훔쳐간 게 분명해요."
청소 이모님이 자신의 화장품을 가져간 게 틀림없다는 손님의 말에 탈의실 내가 소란해졌다. 손님의 말은 이러했다. 손님이 옷 갈아입고 작은 바구니에 화장품과 목욕 용품을 넣고 옷을 갈아입을 때 청소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단다. 그리고 목욕을 했는데 바로 잃어버린 거라 범인은 청소 아주머니라는 거다. 훔쳐간 거 같다가 아니라 훔친 게 확실하단다. 훔쳐서 드라이기 아래 있는 하부장 밑에 숨겨놓았으니 거기를 열어봐야 한다고 했다.
허무맹랑한 손님의 말에 황당했다. 경찰대동 할 때까지 그런 얘기 없었기에 그 말을 들은 청소이모님은 더 어이없어했다. 황당무계한 이야기에도 청소 이모님은 화를 꾹 참고 얘기하셨다. 손님이니 화낼 수도 없고. 못마땅하다는 듯 퉁명스럽게.
청소 이모님 : "내 참.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네. 하부장 다 열어 줄 테니까 한번 봐바요. "
손님은 하부장 이곳저곳 다 확인하며 자신의 화장품을 찾았다. 같이 찾으려고 화장품의 색깔이나 크기, 이름 등을 물어보았다. 손님이 하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손님 : "아모레 퍼시픽 하얀색 샘플이요."
내 귀를 의심했다. 샘플 화장품 찾자고 경찰까지 대동하면서 신고를 했단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쓰는 대중 브랜드인 아모레퍼시픽 샘플인데. 설령 똑같은 샘플을 찾는다고 해도 그 손님 거라는 증거를 찾을 수 있나? 어찌할 바 모르고 있는데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청소 이모님이 자신의 화장품 샘플을 가져간 게 틀림없다고 말하는 손님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며 청소이모님을 잡아가라고 했다.
드라이기 밑에 있는 하부장 그 어디에도 손님의 화장품인 아모레퍼시픽 샘플은 나오지 않았다. 격앙된 손님은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았고 고성이 오가며 한동안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렇게 흥분이 도저히 가라앉을 것 같지 않던 손님은 경찰분들의 끊임없는 회유 끝에 겨우 진정되었다. 지칠만한데도 끝까지 평정심을 찾는 경찰분들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경찰분들이 집에 모셔다 드린다고 하고 데리고 갔다.
경찰분들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경찰분들이 해결하셨다. 역시, 대한민국 경찰 만세다. 나중에 들은 얘기는 그분이 정신분열증이 있는 환자라고 했다. 특히 망상, 의심이 많아 가족들도 고충이 많다고. 화장품 잃어버려 신고했을 때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마음의 병이 있는 분이라니.
앞으로 아모레 퍼시픽 샘플을 볼 때마다 그 손님이 떠오를 것 같다. 아마 평생 기억되겠지. 부디 그 손님의 마음 병이 많이 치유되서 엉뚱한 사람이 오해받는 일이 없길 바래본다.
그나저나 그 하얀 아모레 퍼시픽 샘플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