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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몽 박작까 Sep 03. 2024

막노동하는데 달콤한 냄새가 난다


 커다란 은빛 터널이 길게 이어져 있다. 위로는 노란색 파란색 알록달록한 기차가 지나가고 있다. 은빛 터널 옆으로 길고 긴 레일이 있고 안에 검은색 작은 기차가 주우우욱 늘어져 있다. 어수선한 복잡한 마을 같은 이곳은 어디?



 큼지막한 대형 건조기 위에 올라서서 보는 풍경이다. 찜질방 대청소가 한창이다. 여기저기 구석구석 해야 할 곳이 많은데 오늘은 빨래방이다. 그동안 빨래하고 찜질복을 개기만 해서 신경 쓰지 못했던 구역을 청소하려 한다. 바로 천장. 커다란 건조기 환기구인 은빛 배기통 위에 먼지가 수북하다. 기다란 검은색 전선이 들어 있는 레일 안에도 분홍빛 수건 먼지가 몽글몽글 뭉쳐져 있다. 노란색 파란색 냉온수 수도 라인 위와 형광등 커버 위에도 어김없이 있는 먼지. 높은 곳이라 쉽게 청소할 수 없다. 프로 일잘러 어머님과 아가씨도 건들 수 없는 영역. 바로 높은데 올라가는 거다. 대부분 높은데 올라가는 건 무서워하지. 놀이기구 타는 것도 아니고.         



찜질방 박반장이 나설 때 :)


 언젠가부터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할 때 주저 없이 나선다. 높이 올라가 하는 일은 주로 남자가 한다는 건 편견. (사실 남편은 고소공포증도 있다. 그럼에도 일할 땐 어쩔 수 없이 올라가지만;) 남편은 이거 말고도 할 일이 넘쳐난다. 줄줄이 소시지처럼. 아버님과 함께 직접 렉선반(앵글 선반) 만든다고 바쁘다. 단순 조립 아니고 공간에 맞게 분쇄기로 잘라서 하는 거라 내가 할 수 있는 일 범위 밖이다. 분쇄기로 자를 때는 아주 가까운 데서 불꽃쇼를 볼 수 있다. (현실은 쇠 타는 냄새와 불꽃에 맞을까 꽁꽁 숨는다. 아휴 무서워라) 불을 내뿜으며 공간에 맞게 분쇄기로 자르고 나사와 볼트를 조여 렉선반을 만든다. 분쇄기 작업은 도울 수 없기에 높은 데 올라가는 일 당첨.            


                                 




 사실 얼른 일을 돕고 싶었다. 찜질방 대청소가 며칠 전부터 한창이었는데 학원강사 일을 하느라 돕지 못했다.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잘 알기에 얼른 도와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빨래방 천장 청소를 시작했다. 아침 일찍부터 일하느라 배고픈 다른 사람들은 식당에 갔다. 나오자마자 식당에 가는 밥충이는 될 수 없기에 혼자라도 해보기로 했다. 나가는 남편이 한마디 한다.         

      


"또 떨어지지 말고~ 조심해!"      

"그럼 그럼 걱정하지 마. 엉덩방아 제대로 찧어봐서 잘 알지."    

           


 걱정해 주는 듯 핀잔 섞인 한마디다. (누가 츤데레 아니랄까 봐) 높은 데서 떨어진 건 딱 한번뿐인데. 이후로 많이 올라가서 일했는데도 남편은 못마땅해한다. 그렇게 홀로 천장 청소가 시작되었다. 일단 장갑을 꼈다. 벌겋게 코팅이 되어있는 목장갑을 끼면 천하무적이 된 기분이다.

 이제 천장으로 올라가 볼까. 생각보다 건조기가 꽤 높다. 그렇지만 사다리를 가지고 오기엔 귀찮다. 대충 의자 위를 밟고 식탁 같은 선반을 밟고 건조기 옆 구조물 밟아 건조기 위로 올라간다. 다행인 건 이 정도의 높이는 무섭지 않다는 거다.


 그동안 힘들게 일하는 가족들이 하는 만큼 일을 돕지 못해 신경이 많이 쓰였다. 학원 강사 일로 바빠서 못하고 아이들 데리고 어디 간다고 못하고. 마침 잘 되었다 싶었다. 가족들의 애씀을 잘 알기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함께 못한 시간을 만회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나도 놀고먹기만 한건 아닌데 괜히 찔렸다. 그만큼 마음이 무거웠다.


 위에 올라가 보니 먼지가 많이 쌓여 있다. 건조기 위는 물론이고 배관과 수도관 환기구 윗 공간, 전선이 들어있는 커버와 형광등 커버 위까지. 아래에서만 생활하다 위에 와보니 신세계다. 수건이 붉은색이라 그런지 분홍 빛 나는 먼지가 소복소복 눈처럼 쌓여 있다. 장갑을 낀 손으로 먼지를 뭉쳐 봉지에 담고 걸레로 닦았다. 에어컨도 없는 공간에 먼지 날까 봐 마스크는 쓰고 있어 덥고 답답하다. 등에는 벌써 땀이 주르륵 흐르고 겨드랑이는 홍수가 났다. 얼굴은 말해 뭐 해.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분홍빛 먼지를 제거하는데 달콤한 향이 난다.


‘내가 너무 힘이 들어 정신이 나갔나.’     


 그동안 찜질방 대청소를 돕지 못해서 중압감이 컸나 보다. 드디어 그 부담감이 걷힐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주 개운하다. 더러워진 공간이 깨끗해져 가는 만큼 마음이 가벼워진다. 긍정적인 생각이 치솟으며 내심 기대도 된다. 흐르는 땀만큼 ‘살이 쪽 빠지는 거 아니야?’라는 기대를 하며 더욱 씩 웃으며 먼지를 걷어낸다. 두 개의 건조기 위를 왔다 갔다 하며 열심히 먼지를 닦고 나니 이제 세탁기 위를 올라가야겠다.






 세탁기 위에는 올라설 때가 마땅치 않아 진짜 사다리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요령 피우고 싶어 진다. 사다리 없이 건조기 위를 성공하고 나니 대충 또 올라가 봐야겠다는 알량한 마음이 든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작은 선반을 디뎠다. 옆에 있는 싱크대를 밟고 세탁기 위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이제 올라가려는데 작은 선반이 내 무게를 버티지 못하며 굴러 떨어졌다. 그대로 싱크대를 밟고 올라가려는 나도 중심을 잃고 올라가지 못했다.  (역시. 꼼수 부리다 큰 코 다치지) 다행히 엉덩방아는 아니었다. 세탁기 뒤에 난 기다란 전선 덕분에 살았다. 한쪽 다리가 전선줄에 걸리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면했다. 천만다행이지만 운동신경이 좋지도 유연하지도 않으니 한참을 매달려 있었다. 줄에 대롱대롱 원숭이처럼. 도와줄 사람도 없고 빠져나오는 건 생각보다 곤욕이었다.  내 육중한 다리 한쪽 빼는 게 그렇게 어려울 줄이야. 하긴 공중에서 서커스도 아니고. 전선이 뽑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건가.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청소는 마쳐야지. 다시 올라갈 때는 신중하게 디딜 만한 것을 선택해 조심히 올라갔다. (끝까지 사다리는 가져오지 않았다. 다음엔 좀 가져오자 나야) 그렇게 세탁기 두 개 위 공간도 왔다 갔다 하며 청소를 했다. 세탁기 사이는 팔 길이 정도로 떨어져 있는데 혼자 마음속으로 영화를 찍고 있다. 액션영화에서는 주인공이 건물 사이를 거침없이 뛰어다니며 도망을 치니까. 넘어갈 때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거처럼 열심히 청소했다.



 그렇게 일하다 보니 드디어 마무리되었다. 나는 이상하게 극한에 힘듦을 겪고 나면 겸허해지고 초인적인 긍정이 솟아오른다. 지금껏 겪어보지 못할 정도의 힘듦을 겪을 때 희열이 있다. 이전의 힘듦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힘듦의 역치가 올라갔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든다. 이제 하기 싫고 스트레스받던 집안일이 조금 더 쉬워지려나.


‘힘들게 했던 집안일아. 내가 더 강해졌거든. 넌 껌이야.’ 유치하지만 이런 마음이 든다.      

땀을 한 바가지 쏟아내고 마시는 물은 그렇게 시원하고 달콤할 수가 없다. 계속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고 물을 마시는데 남편이 깔깔깔깔 박장대소를 한다.      


얼굴에 훈장이 생겼다.      



다음날 강의 있다고 못 나오는데 만회 좀 되려나. 마음의 짐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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