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아아아악. 이렇게 차가운데 지금 냉탕에 들어가라고?"
이 한 문장에 나의 심정, 계절감, 정서적 패닉, 그리고 약간의 분노가 다 들어 있었다. 나는 냉탕을 싫어한다. 정확히 밀하면 '발 끝만 담가도 전신의 세포가 뒤집히는 그 느낌'을 싫어한다. 사우나에서 땀 쫙 빼고 냉탕에 들어가면 개운하다는데 나는 단 한 번도 그 개운함에 동의해 본 적이 없다. 내게 냉탕은 '혼을 빼는 곳' 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혼이 나가지 않도록 냉탕에 들어가야만 했다. 자정이 넘은 이 시간에. 팬티 모양으로.
며칠 전부터 냉탕 물 수위가 수상하게 빠지기 시작했다. 냉탕이 있는 여탕은 우리 찜질방에서 가장 큰 탕이다. 물도 가장 많이 들어간다. 그러니 수위가 줄어드는 건 곧 돈이 줄줄 새는 소리였다. 지갑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느낌. 그래서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한 번은 물을 다 비운 김에 샅샅이 살펴봤다. 타일이 깨졌나? 줄눈이 벌어졌나? 그런데 딱히 눈에 띄는 원인은 없었다. 탐정 코난 빙의 실패. 며칠을 끙끙 앓다가 결국 여탕에 손님이 없는 시간인 밤 12시를 택해 남편과 함께 원인 추적에 나섰다.
남편은 탕 가장자리를 돌며 관찰하다 말한다.
"지금 냉탕 안에 직접 들어가 봐."
"...지금? 여기. 나 혼자?"
"여탕인데 내가 들어갈 수는 없잖아. "
"...그럼 옷 벗고?"
"...그건 알아서 하고."
무언의 압박과 말 많은 침묵 사이. 나는 결국 바지를 걷었다. 팬티 모양이 될 때까지. 그리고 까치발을 들고 냉탕에 진입. 발끝이 물에 닿자마자 '으으으으으으윽'. 온몸에 야성의 털들이 일제히 긴장태세에 들어갔다. 종아리까지는 괜찮았다. 무릎부터 시큰했고 허벅지 닿자마자 멘탈이 나갔다. "나이는 못 속인다..."라는 내레이션이 자동 삽입되었다.
겨우겨우 냉탕 안에 들어가 "물 빠지는 구멍 근처에 수상한 기운이 있는지" 느껴보라는 남편의 미션을 수행 중. 조심조심 발을 디뎠지만 결국 팬티형 바지가 젖었고 그 바지 아래의 팬티도 젖었고 그 다음엔 삶의 의지도 젖었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마음으로 상의만이라도 살리자며 기도했으나 얼마 못 가 상의도 젖었다. 그렇게 나는 물에 빠진 생쥐가 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여기구나!' 싶은 수상한 구멍을 발견. 파도풀 쪽은 이상 없고 냉탕의 물 빠지는 구멍 쪽에서 수상한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난다. 조심스럽게 탕 마개를 열어야 했다. 하지만 물이 가득 찬 상태에서는 수압 때문에 열기가 쉽지 않다. 성격 나쁜 항아리 뚜껑처럼 드세다. 5분을 끙끙거리다 궁극의 스킬. 탕 청소 이모님 소환. 이모님이 마개 여는 꼬챙이로 한 두번 하니 바로 열었다. "아. 열리는 구나. 내가 못한거였네."
마개는 멀쩡했다. 며칠 전 교체한 새 마개니까 당연했다. 진짜 원인은 마개 아래 바닥에 있어야 할 고무링이 사라진 거였다. 그거 하나 빠졌다고 냉탕 물이 쭈우우우욱 빠져나가고 있었던 거다. 허탈한 마음을 뒤로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남편이 어디선가 폴리에스테르 재질의 지퍼백을 가져왔다. 크고 두꺼운 지퍼백.
"이게 뭐지?" 싶은 바로 그 느낌의 지퍼백. "이걸 마개 밑에 깔고 닫아. 고무링 대용으로."
...말은 참 간단했다.
물 속에서 눈도 안 보이고 손끝 감각에만 의지해서 지퍼백을 깔고 동시에 마개를 닫으라니? 이건 거의 '물 속의 테트리스' 아니면 1박 2일 벌칙급 미션이었다. 차가운 냉탕 속에서 내가 한 손엔 지퍼백. 한 손엔 마개를 들고 거의 목까지 물에 잠겨 감각에 의지해 고무링의 대역을 깔고 있었다. 그때 내 머릿속엔 이상하게 강호동이 떠올랐다. "자, 간다!" 라며 입수하던 그 장면. 왜인지 모르게 예능인들의 고단함이 갑자기 존경스러워졌다. 이렇게 추운 물 속에서 벌칙 수행하는 게 진짜 고된 일이었구나. 나는 웃지도 않고 있었다.
그렇게 냉탕 안 고무링 실종 사건은 지퍼백이라는 비상처치로 일단락되었다. 새 고무링이 오기 전까지 당분간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이다. 며칠간 수위 떨어져 속을 썩이던 냉탕사건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그날 밤. 나는 물에 빠진 생쥐가 아니라 냉탕 속 N잡러로 한 계단 성장했다. 찜질방 안에서도. 찜질방 밖에서도 나는 N잡을 한다. 강의하고 운영하고 수리하고 냉탕에 입수하고. 이 모든 걸 겪고 나면 경험치가 하나쯤은 오르지 않겠나 싶다. 뭔가를 뚫고 나올 때마다 내 안에 숨어 있던 레벨 1 '어쩔 수 없이 강해지는 캐릭터'가 업그레이드 되는 기분이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생각보다 쉽게 잠이 들었다. 몸은 차갑고 마음은 묘한 따뜻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