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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 며느리 맨날 칭찬한다니까

by 다몽 박작까


"이 집 며느리 맨날 칭찬한다니까~"


...네? 누구요? 저요? 내가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왜냐면, 그 말을 하신 분이 '그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매일같이 불평을 한아름 싸 들고 오시는 말하자면 찜질방의 클레임 여왕이셨다. 매일 오니까 미세하게 다른 걸 캐치하고 불편한 걸 얘기해서 더욱 쾌적하게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겠지. 그래서 그분은 다양하게 요구를 하셨다.


'불한증막 온도가 더 올라갔으면 좋겠다. '

'한증막 이용할 때 너무 건조한 것 같다. '

'중간에 물 주는 시간에 물을 더 많이 듬뿍 줬으면 좋겠다.'

'바가지에 물 넣어서 한증막에 들고 가는 걸 가능하게 해 달라. ' 등등등


그분의 레퍼토리는 무궁무진했고 정말 매일같이 들을 수 있어서 웬만한 유튜브 알고리즘보다 정밀했다. 한마디로 불평계의 GPT. 이쯤 되면 무슨 얘기를 해도 마음을 못 돌리실 것 같았는데, 그분 입에서 내 칭찬이 나왔다. 설마 우리 사이에 라포가 생긴 거?






예전에 나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시절 CS교육을 수도 없이 들었다. 불평 환자 한 명이면 하루가 꼬이고 팀 분위기가 가라앉고 가끔은 삶이 흔들리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배운 게 있다.


불평 고객 = 잠재적 찐팬 + 서비스 품질 알람 시스템


물론 이걸 진심으로 믿는 데 5년쯤 걸렸다.


CS 교육에서 알려준 마법의 5단계는 이렇다.

1. 경청 - 중간에 말 끊지 말고 들어라

2. 공감 - "저라도 속상했을 것 같아요" 같은 말 꼭 하기

3. 사실 확인 - 누구 잘못인지 찾지 말고 뭐가 어떻게 된 건지만 파악

4. 현실적 해결책 제시 - 절대 "알아서 하세요." 하지 말기

5. 감사 표현 - 불만제기 = 피드백 = 공짜 컨설팅


그런데 이걸 실제로 해보면 진짜로 통한다. 너무 무서운 게, 진심을 내면 상대도 진심을 내기 시작한다는 거다. 처음엔 '갑자기 왜 이러지?' 싶지만 그게 라포의 시작이다.



그분은 여탕 탈의실에서 쩌렁쩌렁하게 말씀하셨다. 탈의실에서 하는 얘기가 바깥에 있는 카운터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초기에는 나도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 마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공법을 택했다. 이 방법은 어떤 상황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거니까. 그래서 그 손님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매일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얘기를 하셔서 때론 피하고도 싶었지만 열심히 들었다. 그러면서 공감했다. "그러셨군요. 속상하셨겠네요~." 그리고 내용 정리를 하며 해결책을 찾았다. 문제가 고장 나거나 잘 안 돼서 그러는 거면 빨리 시정하겠다고 말씀드리고 해결하려고 애썼다. 해결이 빨리 안 될 때에는 안 되는 이유도 얘기드리면서. 고치는 게 아니라 그분의 개인적인 의견이라 안 되는 거라면 그 이유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러면서 끝에는 말씀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꼭 드렸다. 그렇게 몇 번 하고는 나중에는 불만을 얘기하지 않을 때도 눈이 마주치면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다. 미운 정도 고운 정이라 그런가. 점점 그 손님도 나도 조금은 서로의 벽이 무너지는 듯했다. 어느 순간, 불평은 줄어들고 인사만 남았다. 그분도 나도 어쩌다 보니 정을 붙인 사이가 된 거다. 찜질방판 '트레이너와 클라이언트'같은 관계랄까.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둘째 아이를 학원에서 데리러 와 아이와 함께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나를 향해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아들이 여기 학원 다니나보네~ 나는 여기 근처 살아~"

"아...네...어...?"

(누구지...? 나한테 저렇게 환하게 웃을 사람이 있었나?)


그리고 갑자기 머릿속에서 목욕바구니와 수건 냄새가 동시에 떠올랐다. 아. 그분. 찜질방에서는 늘 발가벗고 있으셔서 밖에서 옷 입고 나타나시면 누군지 모를 수 있다는 충격의 교훈. 그렇게 알게 됐다. 그분도 그냥 우리처럼 아이 키우고 학원 다니고 동네 살아가는 사람이었다는 걸. 그리고 이 라포는 발가벗은 공간에서 생겼다는 점에서 유난히 더 사람 냄새가 났다.






간호사 시절도 그랬다. 처음엔 피도 눈물도 없이 까칠하던 환자분도 마음의 문이 열리면 혈압도 잘 재고 밥도 잘 먹고 "고맙다."는 말까지 꺼낸다. 그건 라포라는 마법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말없이 말 들어주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게 항상 이렇게 훈훈하게 끝나는 건 아니다. 끝까지 마음 안 여는 분도 있다. 한 번 라포가 열리면 그 다음은 VIP급 요구가 쏟아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그날 그분의 한마디. "그 집 며느리 참 잘해~"는 하루 종일 찜질방 물 온도가 0.5도쯤 더 따뜻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탕을 둘러보면서 손님에게 인사하는 일이 많아졌다. 한두 번 오는 손님이 아니라 거의 매일 같이 오는 단골손님들이 많아져서다. 그 손님들 중에는 한결같이 매일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분들도 있고 아까 그 손님처럼 불만이 쌓였다가 라포형성이 된 분들도 몇 분 더 생겼다. 그렇게 노하우가 생기나 보다.


사람은 누구나 불편한 걸 말하고 싶어 한다. 그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있으면 라포가 되고 관계가 되고 동네가 되고 나중엔 칭찬이 된다. 찜질방에도 병원에도 그리고 일상에도 결국 정답은 하나다.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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