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30분. 대다수가 아직 이불속에서 자고 있을 고요한 시간. 집 전체가 깜깜한데 내 공간만 불이 켜져 있다. 나는 뭔가를 열심히 포장 중이다. 아주 적극적이고 진지하게. 이상할 정도로 생산적이게. 전등 하나 켜놓고 포장을 하고 있으니 약간 드라마 같다. 가내수공업 장인의 포스 같달까?
이 시간의 고요함이 좋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 시간. 잠이 덜 깨 멍한 상태이지만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머리를 쓸 필요가 전혀 없다. 그저 손만 있으면 된다. 포장하고 있는 게 특별한 건 아니다. 바로 초코파이와 레모나다. 빨간 상자 안에는 12개의 초코파이가 들어 있고 노란 상자 안에는 레모나가 10개 들어 있다. 이걸 하나씩 투명 비닐에 넣는다. 조합은 세 가지다. 초코파이 + 레모나, 초코파이 단독. 레모나 2개. 머리는 덜 깼는데 손은 묘하게 빠릿빠릿하다. 단순 노동인데 마음이 평온하다. 어릴 적 엄마가 식탁 위에 수저 좀 놔라라고 할 때 그 수저 놓기처럼. 별거 아니지만 또 절대 무의미하지 않은 일.
나는 지금 뇌물을 포장하는 중이다. 군부대 강의를 위한 뇌물. 초코파이와 레모나로 마음을 사려는 거다. 사실 강의라는 게 그렇다. 내용을 아무리 잘 준비해도 청중의 눈꺼풀이 준비 안 돼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강의에 앞서 이 고요한 새벽에 포장을 한다. 그런데 사실 이걸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나 스스로도 좀 웃기긴 하다. 잠이 덜 깨 눈도 반밖에 안 뜬 얼굴로 비장하게 초코파이와 레모나를 매칭하고 있다. 어울림과 조화. 수량 안배까지 고려하면서. 이쯤 되면 단순 노동은 아닌 거 같다. '초코파이 의식'이라고 해야 하나? 포장을 마친 아이들은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다. 개수는 모른다. 굳이 세진 않는다. 어차피 이 노동의 끝은 수량이 아니라 성의니까.
강의하기 전 날 나는 늘 조금 떤다. 아니 꽤나 떤다. 그럴 때 남편이 꼭 한마디 한다.
"뭘 걱정해~ 어차피 다 잘 텐데. 나도 군대에서 강의 들을 때 맨날 잤어."
이 말은 들을 때마다 묘하다. 약간 서운한데. 또 이상하게 위로가 된달까? 어차피 아무도 안 들을 거라는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모두가 나를 외면할 가능성 덕분에 덜 무서운 것이다. 그래도 나는 영향력 있는 강사이고 싶다. 그냥 다 자는 시간 말고 한 명이라도 강의를 들었으면 좋겠다. 모두에게 그러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이상하게 기억에 남는 날이었으면 했다. '그날은 좀 달랐지' 하고. (그게 내 목표이기도 하다. )
군부대 강의 주제는 보건 안전에 관한 것이다. 감염병 예방, 중독 예방, 응급 처치 등등. 나름 진지하고 중요한 내용이다. 그런데 문제는 군인들이 강의를 안 듣는다는 거다. 남편 말대로 교육이 있으면 자는 시간으로 인식하는 거 같다. PPT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하나둘씩 눈이 감는 군인들이 늘어날 테니. 그래서 뇌물이 필요하다.
요즘 군인들은 월급이 200 가까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과연 초코파이에 반응할까 싶었다. PX에도 널렸을 텐데. 너무 유치하지 않을까?라고. 그런데 첫 강의에서 그 모든 의심이 무너졌다. 초코파이 하나로 분위기가 살아났다. "오~ 초코파이~"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들렸다. 스르륵 감던 눈이 떠지고 사람다운 반응이 돌아왔다. 그 순간 확신했다. "역시 먹을게 최고네." 그럼에도 모두가 다 반응하진 않는다. 10~20% 정도만 반응해 주는 군인 분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보통 강의를 이끌게 된다. 희한하게 부대마다 리액션 좋고 질문에 답을 크게 잘하는 분들이 항상 있다. 그분들이 강의 분위기를 바꾸고 그 분위기가 퍼지며 더 많은 군인들이 눈을 뜨고 듣게 된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초코파이를 주고 싶다. 감사와 격려의 의미로. 그리고 무언의 협상의 의미로. "계속 반응해 주세요. 대답도 해주시면 더 좋고요. 최고예요."
두 번째 군부대 강의를 갔다. 가방 가득 뇌물과 함께. 군부대는 들어가는 정문 앞에서부터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큼지막한 표지판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 표지판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민간인 출입 금지" 그 문구를 볼 때마다 이상하다. 내가 지금 들어가도 되는 건가?라는 위축감이 든다. 그렇지만 사전에 위병소 출입신청이 완료되어 커다란 철문이 열리면 또 신기하다. 뭔가 되게 중요한 사람이 된거 같은 근거 없는 자부심이 생긴다. 찜질방 기계실 들어갈 때도 비슷한 감정인데 그때보다 백 배쯤 더 짜릿하다.
군부대는 차량이 통과해도 바로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위병소 근처에 차를 주차해 놓고는 위병소에 들어가야 한다. 어떻게 왔는지를 말하고 신분증을 확인한다. 그리고 '통제구역보안서약서'와 위병소 출입대장을 작성한다. 통제구역보안서약서. 이름부터 분위기가 벌써 상엄하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스파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눈에 레이저를 비추며 하는 맹세 같은 내용이 내 손 끝에서 펜으로 사인을 하고 있다.
군부대는 들어서면 뭔가 분위기가 장엄하다. 공기도 무거운 느낌이랄까. 딱딱한 군복 입은 사람들이 정해진 동선에 따라 움직이고 모든 게 조용하고 엄숙하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 속에 나는 초코파이가 가득 든 가방을 들고 있다. 약간 이상한 조합이지만, 그래서 더 오히려 좋다. 무게감 넘치는 군대의 엄숙함과 달콤한 간식이 담긴 가방의 푹신함이 맞닿는 순간이니까. 초코파이가 그런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은 깨는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아이러니함이 그래서 더 좋다.
군부대 강의는 초코파이 없이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초코파이와 함께 할 때 그 강의는 '기다림'이 생기게 되는 거 같다. 좋은 강의를 하고 싶어 생기는 떨림이 초코파이와 함께 설렘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나는 오늘도 조용히 믿는다. 초코파이 하나로 시작되는 강의가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끄덕임 하나라도 남길 수 있다면 이 노동은 꽤 괜찮은 노동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