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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민 Dec 11. 2022

낯선 엄마의 기일

잊힌다는 것에 대하여

 1988년 10월 12일. 미영의 어머니가 숨을 거둔 날. 미영의 아버지는 매년 이맘때가 되면 메시지를 보낸다.

 "오늘이 너희 선비(先妣) 기일이다."


 재작년 겨울, 파묘 후 화장을 한 이후로는 일 년에 두 번 벌초를 맡기는 일도, 기일에 북어와 청주를 사 들고 산을 오르는 일도 없었다. 중년이 되어서야 부모님을 떠나보내신 아버지는 몰랐다. 딸은 엄마가 돌아가신 게 아직도 얼떨떨하고, 엄마라는 존재를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을. 미영도 아버지의 심정을 몰랐다. 왜 이런 문자를 자꾸 보내는 건지, 자신이 무얼 해야 마땅한 건지 말이다.


 10살 미영은 스케치북을 폈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엄마의 실루엣을 크레파스로 더듬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그려봐도 그녀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과 가까워지지를 않았다. 부족한 그림 실력을 탓했고, 중요한 것마저 벌써 놓쳐버린 기억력이 부끄러웠다. 몇 년이 지나서야 사진으로 만난 엄마는 너무나 선명해서 낯설었다. 딸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젊은 여자의 모습이 생경(生硬)했다.


 미영에게 엄마에 대한 기억은 모조리 혼나거나 섭섭했던 것뿐이다. 골목에서 큰일이 급해 실수를 한 자신을 원망스럽게 째려보던 것, 무슨 이유였는지 사람 키보다 더 긴 회초리를 든 엄마를 피해 할머니 등 뒤로 피신했던 것, 사촌 동생과 함께 엄마 몰래 콤팩트 파우더를 바르다가 들켜서 혼나고, 매운 물비누로 얼굴을 닦아야 했던 것, 다 같이 작은 방에서 자다가 도둑이 들어 깼는데 엄마가 다시 자라고 쉿! 하던 것. 이렇게 몇 장면이다. 그나마 엄마의 얼굴은 흐릿하다. 엄마가 담긴 사진에서도 미영이 안겨 있거나 미영과 함께 노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병으로 돌아가시기 2~3년 전부터 기력이 쇠하여, 손이 많이 가는 어린 딸을 잘 돌보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뿐이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만, 미영이 지금 떠나더라도 그녀의 두 딸은 자신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그리워해 줄 텐데, 그 딸들이 내 나이쯤 되어서도 여전히 기일에는 나를 찾아줄 텐데. 엄마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어린 딸을 두고 다른 세계로 떠났다. 자신이 남긴 반 쪽에게 이토록 철저히 잊힌 엄마는 슬플까, 나처럼 무뎌져서 그저 얼얼한 기분일까, 아니면 이 세계의 모든 걸 잊었기에 신처럼 평안할까. 계류유산으로 수술을 마치고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문밖에서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을 남편보다 먼저 생각났던 건 '엄마'라는 이름이었다. 엄마와 볼을 비비던 느낌을 기억할 수는 없어도 그 존재의 빈자리는 이따금 아프게 와닿았다.


 4kg 우량아로 태어나 워낙 통통했던 미영은 그즈음 나날이 말라갔다. 쯧쯧, 그 투실투실하던 게 저렇게 비쩍 말랐네, 오랜만에 7살짜리 미영을 본 고모는, 누가 보기 전에 얼른 눈물을 훔쳤다. 복도 없지, 새엄마라고 하필, 하루가 멀다 하고 애가 너무 울고 속을 썩여 고모네로 보내겠다, 짐가방을 싸 놓고 전화를 해 대는 지랄맞은 년을 만난 탓이렷다. 흔히 그 시기에 오는 식욕부진의 여파였을 수도, 키가 크느라 그랬을 수도 있었지만, 새 올케의 행실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미영이 8살이 되자, 벌써 애 둘을 낳은 새엄마는 긴 방학을 동네방네에 고발해 댔고, 고모는 방학 때마다 미영을 집으로 불렀다.

 "올케, 미영이는 방학 동안 우리 집에 맡겨. 어린애들 보기도 힘들 텐데. 내가 이렇게라도 도와줘야지."

 청과 사업도 자리가 잡혔고 딸 둘도 다 키웠겠다, 죽은 올케한테 받았던 신세를 이렇게라도 갚을 수 있다면, 첫 번째 결혼을 사별로 마무리하고 어깨가 축 처졌던 동생을 위해서라면, 어린 것이 잠시라도 편히 지낼 수 있다면. 고모는 그런 마음으로 방학 때마다 미영을 맡았다.


 알랭 드 보통이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쓴 『불안』을 읽으면서 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울고 떼를 써도, 때로는 오히려 그렇기에 사랑받을 수 있단다. 나는 내 자식에게 그랬지, 나는 어땠을까, 아기 때의 기억이 남아있을 리 없다. 미영은 그런 애정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어려웠기에, 엄마가 되기 전까지 사랑받은 기억이 채우지 못한 공간을 다른 것들로 채워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실상은 쩔쩔맸을 뿐 그 공동(空洞)에서 불어 나오는 시린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다행히도 우등생, ‘인싸’를 가장한 자아를 만들고 그 속에 살면서 비로소 숨을 쉴 수가 있었고, 이제는 자신의 딸들을 어린 미영과 동일시하며 날마다 자신을 치유했다.


 미영과 함께 살았던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 큰아들에 이어 셋째 딸마저 먼저 보낸 슬픔을 가누지 못하여, 손녀에게 살아생전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했다. 할머니는 자신의 기억 속에 살고 있던 서른아홉 딸을, 손녀가 스무 살이 되도록 바깥세상으로 돌려보내지 못했다. 그 대신 매일 저녁 담배를 태운다는 핑계로 남몰래 깊이 한숨짓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모도 자신보다 2살 어렸던, 미영의 엄마가 죽던 즈음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해주지 못했다. 어쩌면 전해주지 않는 건지도 몰랐다.

 "네 아빠는 뭐라 하디? 글쎄, 걔가 아팠으면 지인작에, 말했겠지. 말은 안 했지만 병원에도 찾아다녔겠지. 네 엄마는, 갑자기 아팠던 거야."

 이어서 불필요할 만큼 장황하게, 그 당시 노처녀 취급받던 자기 삶을 대변하는 게 이모의 답이었다. 엄마는 피를 나눈 존재들에게서도 그렇게 잊혀 간 것이다.


 미영은 자기가 봤던 암 환자들의 상황에 엄마의 과거를 대입해 봤다. 끝없이 피곤하고, 이유 없이 여기저기 아팠을 거다. 옆구리,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심하게 저렸을 거다. 걸을 때마다 다리에 힘이 풀렸을 거다. 두통도 심해서 내가 치대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을 거다. 남편은 밤낮없이 직장에 있었고 집에 오면 쓰러져 자기에 바빴다. 아이들은 너무 어려서 엄마의 말 상대가 되지 못했다. 집안 사정으로 대학은 중퇴했고 자연히 친구들과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10년 넘게 다닌 직장이었지만, 결혼하고 그만둔 뒤로는 동료들과 만나는 일도 뜸해졌을 거다.


 종일 제대로 된 대화라는 걸 할 수 있었을까. 직접 만나지 않고서는 길게 이야기 나누기도 어렵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아이를 데리고 누굴 찾아다닐 만큼 체력이 좋거나 사교적이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심한 우울감으로 거울을 들여다보거나 빗질을 할 만큼 자신을 돌보기도 어려워서, 병원을 찾아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어머니는 여자보다 강하다며 엄마라면 응당 자녀를 억척스럽게 키워내고 살림도 척척 해내는 강인함을 기대하던 그 시대에, 도대체 엄마는 어떻게 지냈던 걸까.


 그렇다. 현재와 미래는 과거에 붙들려 여지가 크지 않지만, 과거는 희미하게 기억되고 잊히기에 오히려 활짝 열려 있다. 미영은 어린 시절 엄마를 잃었기에 40대가 된 지금도 그 상실을 괴롭게 곱씹고 있으며, 할머니가 되어서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엄마의 죽음을 매번 다시 경험하게 될 것이다. 갑자기 엄마가 되살아난다거나 그 상실감이 말끔히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현재와 미래는 오히려 닫힌 결말이라고 하는 게 맞다.


 그러나 과거는 매 순간 미영의 머릿속에서 새롭게 쓰이고,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다르게 경험되고 있다. 이미 돌아가신 엄마의 나이를 추월한 지금부터는, 그 당시 어리고 아프고 외롭던 한 여성이 상실하고 잊혀 갔던 지난날을 처연(悽然)하게 돌아보게 될 것이다. 열린 과거가 끝없이 새로운 이야기로 생산되고, 때로는 다른 이의 이야기가 되기도, 다른 이의 죽음이 그 과거의 죽음과 맞닿기도 할 것이다. 


* 사진: Unsplash (Jason Le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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