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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민 Dec 16. 2022

직장 여성다운 게 뭔데

 55분. 휴, 길 안내 장치가 오늘도 막힌다고 하네. 오늘같이 눈이 많이 내린 날은 그렇다. 최미란 씨는 광주 외곽에서부터 분당까지 출근을 한다. 여느 때 같으면 새벽 5시 즈음 식사 준비를 해 놓고 "남우야, 일어나서 밥 먹어. 자기, 일어나야지이!" 채근을 하며 급하게 샤워하러 욕실에 들어갔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다. 코가 문제였다. 거울 속에 비친 거대한 매부리코는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것 같다. 마녀라고 놀림받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쉰둘이 된 지금도, 웬일로 자신을 빤히 보는 사람이 있으면 코 때문에 그러나 싶어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일찌감치 화장을 익혔고 미용실, 마사지숍은 가장 실력 좋은 곳으로만 찾아다녔다. 빠듯한 남편 월급으로는 이런 소비를 마음 놓고 할 수가 없어서, 간호조무사 일을 계속해야 했다. 샤워 후 공들여 화장을 한다. 음영을 넣어 코와 턱을 반 정도는 깎아 내고, 인조 속눈썹과 펄 샤도우로 자신 있는 눈매를 강조한다. 사람들이 코를 덜 쳐다보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오늘은 늦잠을 자서 큰일이다. 그래도 화장은 포기할 수가 없어, 눈길이라 차가 막힌다고 둘러대기로 한다.


 아차차, 급하다고 향수를 빼놓을 수는 없지. 치이이익, 비말에 갇힌 향기 입자들이 공기 중에 흩뿌려져 머리카락, 얼굴, 코트 어깨에 우아하게 내려앉는다. 요즘 들어 화장만큼 공을 들이는 것이 향수다. 좋은 향기가 호감을 배가시켜 줄 테니까. 게다가 담배 냄새도 가려준다. 이쪽에서 알아주는 애터미 치약보다 효과가 좋은 것 같다. 담배는 남편도 모르는 은밀한 취미다. 병원에서도 담배 냄새나는 아줌마를 고용해 주지는 않을 테니까. 담배를 즐기기 위한 생존전략이라고 해야 할까.


 향수는 왜 이렇게 비싼 걸까. 얼마 전에 성수 엄마가 해외여행 다녀온 거 자랑질하느라 계모임에 샘플 향수를 돌렸는데 그 향이 마음에 쏙 들었다.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문 것 같은 달콤한 향인가 싶더니 진녹색의 싱싱한 잎이 잔뜩 달린 장미에 둘러싸인 것 같은 향이었다. 장미향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히 이런 좋은 향이 맞을 거다. 생일에도 남편이 꽃 한 송이 안 주는데, 꽃다발 받은 기분이랄까. 가격을 알아보니 100미리 한 병에 십수만 원이란다. 향수마저 내가 서민이라는 걸 기억나게 해 주네.


 중학생 딸내미한테 엄마가 사고 싶은 향수가 이건데 너무 비싸다고 하니 "기다려봐" 한다. 잠시 후 연아가 내민 휴대전화 화면을 보니, 명품 향수와 똑같은 이름의 50미리 향수가 단돈 만원이다.

 "야, 이거 진짜래?"

 "그럼! 리뷰 읽어 봐. 사람들이 명품이랑 똑같다는데? 근데 엄마, 이거 오렌지랑 바닐라, 이런 향이라는데? 향수 이름 잘못 본 거 아냐?"

 "아냐, 분명히 그 이름 맞아. 여기, 만 원 줄 테니까 지금 시켜."


 연아가 졸라서 메이크업 컨설팅이라는 걸 받으러 분당에 왔다. 뜻밖에도 내가 하던 화장법, 옷차림, 향수가 전부 나랑 안 어울린다는 거다. 하지만 젊은 여자가 확신에 차서 이야기를 이어 갔고, 엄정화 느낌으로 스타일링을 하면 잘 어울릴 거라니 괜히 솔깃하다.

 "엄마, 엄정화 좋아하잖아. 잘됐네."

 "쬐그만 게, 엄마 놀리냐? 그럼, 선생님이 엄정화 느낌 향수도 추천해 주세요."

 "향수요? 음, 나무향, 풀향은 어떠세요? 계피, 향 냄새 같은 것도 잘 어울릴 거예요."

 엥? 담배도 말린 잎을 태우는 게 아닌가? 그럼 담배 피우면 향수도 필요 없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에 실소하며, 미란 씨는 이참에 향수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분당의 한 병원에 취직했다. 광주 촌구석 의원보다 일은 많아도 수입도, 복지도 더 낫다. 손이 빠르고 일을 잘해도, 표독스러워 보이는 인상 때문에 번번이 면접에서 미끄러졌다. 바뀐 화장과 향수 덕에 주변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도 한결 부드럽다. 진작에 나한테 어울리는 스타일로 하고 다닐걸. 매력적인 향기를 풍기며 접수대에 앉아 환자와 의사 사이를 이어주는 간호조무사, 그게 나다. 이런 모습을 남기고 싶어서 환자가 뜸할 때 '셀카'를 남기는 게 낙이다. 이 순간의 향기도 간직해 주는 사진이 있다면 좋을 텐데.


 미란 씨 주변 동료들은 그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점심식사 후 휴게실에서 잠깐 눈 좀 붙이려는데, 수진이 년이 나보고 들으라는 듯 다른 동료들과 큰 소리로 대화를 이어간다.

 "다음 주 화요일에, 계약 연장 발표 나잖아? 사무실 앞 지나가다가 부장, 과장들 대화, 내가 얼핏 들었거던? 한두 명쯤? 잘리나 봐."

 "아니, 그게 누구래? 요즘 분위기 좋지 않았나?"

 "딱 감 오잖어? 만날 지각하고, 틈나면 셀카나 찍어대는 사람 있잖어."


 이년아,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여기서 1년 동안 일하면서 지각한 게 이번이 2번째다. 너는, 젊은 년이, 지척에 살면서도 애가 아퍼서, 애 보느라 어깨가 아퍼서, 시댁 제사가 있어서 미꾸라지처럼 조퇴도 하고 휴가도 냈지. 그 빈자리는 누가 채웠냐. 그게 나였지. 눈치 보느라 자청해서 휴가도 반납하고 이 자리 지켰다고. 너처럼 살갑고 약지 못해서 내가 우습냐. 미란 씨는 그렇게 속으로만 실컷 해 댔다. 싸움을 걸어봤자 질 게 뻔하니까, 약자니까.


 부장님, 최미란 씨는 계약 연장하면 안 돼요. 멀리서 오는 건 알겠는데, 저희가 사정한 것도 아니고, 그건 그 사람 선택이었잖아요? 강원도에 눈 오는 게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요즘 눈을 얼마나 잘 치워 놓는데, 그게 지각 사유가 안 되죠. 틈만 나면 셀카를 그렇게 찍어댄다고, 얼굴 화장 떡칠하고 향수 냄새 풍기며 공주처럼 손 하나 까딱 않는다고, 주변 직원들 사이에서 말 많아요. 


 저는요, 그분 많이 봐줬어요. 길이 막힐 거 알면서, 그 화장 좀 안 하고, 헬멧 쓴 거 같이 드라이 좀 하지 말고, 향수 범벅할 시간에, 그냥 일찍 출발했으면 안 늦었겠죠. 제시간에 복장 갖추고 앉아서 일 시작하는 게 그렇게 힘들면, 그만둬야죠. 다른 아줌마들도 다, 살림하면서 일하는 건데요.


 월급 받으려면 집에서 반찬을 직접 만들든, 사다 먹든, 아침을 건너뛰든, 퇴근 후 장을 보든, 일터에서는 내색하면 안 되죠. 뭐, 부부싸움을 했든, 폐경기라서 열이 수시로 올라오든, 친구랑 전화로 이년 저년 싸웠든, 옆 진료실 동료랑 쓸데없이 기싸움을 했다 쳐도, 맡은 일은 똑바로 해야죠. 어른이면, 직장여성이면, 워킹맘이면, 당연히 그렇게 사는 거 아니에요? 부장님이나 저희도 그렇게 살잖아요? 요즘 시대에, 애들 학원비라도 벌려고, 다들 기를 쓰며 사는데, 왜 최미란 씨만 지 몸뚱아리 챙길 거 다 챙겨가며 사냐고요. 암튼, 저는 그분 변호 못 해 줘요. 


* 사진: Unsplash (Ulysse Pointche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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