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_멜번에서 잠시 쉼표

사춘기딸과 여행, 빅토리아 내셔널 갤러리

by 경쾌늘보


부상이 속(썩)일지라도


“으악~~!”

햄스트링을 마사지해 주는 물리치료사 앞에서 달씨는 참을 수 없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왜 이렇게까지 마라톤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치료사에게 달씨는,

“아.. 꼭 완주할 건 아니고 플랜 b는 DNF(did not finish) 생각하고 있어요.”

이 상태로 무리했다가 아예 못 달린 러너들 많이 봤다고 치료사가 겁을 준다.

달씨도 속으로 생각했다.

"음, 나도 그렇게 말하는 의사와 치료사들 많이 봤지요."


마라톤이 목적이지만 이번 멜번에 가는 특별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사춘기 딸과의 단둘 여행이다. 달씨 남편은 일정상 못 가게 되었고, 아들은 곧 친구들과 멜번 여행 계획이 잡혀있었다.

마침 방학인 딸, 당첨!

햄스트링이 달씨를 속(썩)일지라도, 오랜만에 딸과 둘만의 동행이기에.



특별한 동행


멜번 마라톤이 3일 남은 날이었다. 마라톤이 무리여서 못하게 되더라도 딸과의 여행으로 갈 이유가 충분했다. 마라톤이 달씨에게 자꾸 선물을 준다. 작년에는 '혼자 여행'이라는 특권을, 올해엔 '모녀 여행'이라는 특별함을 선물 받았다.


달씨가 여행 가방을 꺼내자, 강아지가 함께 가는 줄 알고 더 바쁘다. 챙겨갈 짐에 마사지건, 마사지볼, 폼롤러, 아이스팩, 진통제 등 통증 완화를 위한 도구들이 추가되는 걸 보니 달씨 이제 러너인가 보다.


대회는 10월 12일 일요일, 모녀는 금요일 제일 이른 비행기로 애들레이드를 떠났다. 혼자 갔다면 그리고 첫 마라톤이라면 배번 수령하는 곳으로 먼저 갔겠지만, 달씨는 이번 여행은 좀 더 느긋하게 딸에게 많이 맞추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멜번에 왔던 때가 3년 전이었다. 영국 맨체스터 축구팀의 원정 경기 보러 가족이 함께 날아갔으나 호날두 선수가 또 나타나지 않아 실망을 했던 때다. 그러나 당시 쇼핑을 좋아하는 달씨 집 두 남자는 멜번을 누비느라 신났었다. 반면 옷 사주겠다 해도 관심이 없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딸이었다. 3년 지난후, 그 딸의 첫 관심지는 다름아닌 쇼핑센터이다.


호주에서는 종종 대단함을 내세우는 문구로 “남반구에서가장 ㅇㅇ한”이라는 말을 쓴다. 남아프리카, 남미 등 남반구에서 딱히 경제력을 갖춘 나라가 많지 않음에도 말이다. 모녀는 그 ‘남반구에서 가장 큰’ 채드스톤 (Chadstone) 쇼핑몰로 갔다. 요즘따라 쇼핑몰이 피곤한 달씨는 분명 걸음수가 상당할 터라, 매도 먼저 맞아야 한다는 계산으로 마라톤 전날을 피해 도착한 날 바로 딸의 위시리스트 하나를 해결했다. 아니 해치웠다.



마라톤, 노 빠꾸


마라톤 하루 전 토요일, 달씨는 딸과 멜번의 아침 8시 파크런을 가보고 싶었지만 이날만큼은 호텔에서의 아침 꿀잠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모녀는 조식을 즐기고 배번 수령하러 엑스포로 향했다. 2Km 정도 걸어가면 좋을 위치로 랜슨 플레이스 (Lanson Place) 호텔에 묵었다. 출발지로 가는 길에 공원을 가로질러 걸으며 워밍업도 되고 긴장도 풀 수 있는 거리이다.


가는 길에 달씨는 딸에게 말했다.

“있잖아, 엄마 하프로 바꿀 수 있음 변경할까해.”

하프로 변경할 수 있다는 옵션을 생각하니 달씨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치료사 말대로 혹시나 햄스트링이 악화되거나 찢어지면 이후 파급이 끔찍해서였다. 당장 비행기도 탈 수 없고 일상이 어그러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우려와 풀코스를 할 수 있을까 하는 핑계도 있었으리라.


둘은 북적이는 분위기의 멜번 크리켓 경기장(MCG)야외 마라톤 엑스포에 도착했다. 제일 처음 보이는 것은 42.195km 참가자들의 이름이 깨알처럼 박혀있는 대형 월. 참가자들은 흥분되어 각자의 이름들을 찾아 사진을 찍고 있었고, 딸과 이름을 찾은 달씨는 돌이키기엔 늦은 강을 건넌 느낌이었다. 마라톤은 빼박이었다.

일명 노빠꾸.

“이왕 이렇게 된 거 엄마 내일 마라톤 출발하지 뭐!”

큰소리쳤지만 마음은 마라톤 엑스포 한쪽에서 열리고 있는 어린이 미니 마라톤처럼 시끄러웠다.


주사위는 던져졌던가


“엄마, 오늘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한 군데 가고 싶은데 있는데, 네가 신나할 곳은 아니지만 같이 갈래?”

"응"



마라톤 전 테라피


둘은 엑스포를 빠져나와 멜번 시내의 멋진 광경들을보며 천천히 걸었다. 시내 한복판의 수많은 테니스 코트며, 굵은 물줄기가 흐르는 야라 강, 그리고 강가에서 노 젓거나 산책하는 사람들을 지났다. 언제봐도 고전과 현대가 잘 어우러져 있는 멜번 도심.


멜번의 강, 건물, 테니스코트



그중에서도 달씨가 좋아하는 곳은 빅토리아주 미술관, ‘내셔널 갤러리 오브 빅토리아 (National Gallery of Victoria)’이다. 달씨가 멜번에 올 때마다 짬을 내어 꼭 챙겨 가는 곳이다. 예전에는 뛰어다니는 아이들 덕에 큐레이터며 시큐리티 가이드들과 참 눈도 많이 마주쳤다. 아이들이 커서는 조용히 혹은 혼자 방문하여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NGV의 담장이 서서히 보일 때부터 달씨는 마음 차분해짐을 느낀다. 그리고 물이 위에서부터 유리벽을타고 잔잔히 내리는 입구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서면더 평온해진다. 달씨가 낯선 나라 호주에서 유독 한 갤러리에 정이 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멜번의 다른 건물들은 매우 유럽 양식을 추구했다. 그런데 NGV 건물의 돌벽은 어딘가 동양스럽고, 어딘가 한국의 사대문이나 산성 같은 느낌이 들어서일까.


물을 다루는 방식도 다른 서양 건물들과 다르다. 대부분 서양 양식은 화려한 분수대를 놓는다. 하지만 이 건물은 위에서 아래로 반투명 유리벽을 타고 잔잔히 흐르는 물벽, 수(水)문을 통과하여 새로운 경계로 들어가는 디자인이다. 경계를 넘어 들어서면 서양식 미술관처럼 직선의 동선이기보다, 중정과 회랑을 지나는 동양식 여백과 고요가 있어서 인 것 같다. 어딘가 한국 같아 잠시 마음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서일지 모른다.


마라톤 전날 러너들의 하루는 어떨까?

어떤 사람들은 가벼운 달리기를 하고, 혹은 산책을, 맛있는 것을 먹고, 어떤 사람들은 반려동물들을 만지기도 한다고 한다.


마라톤 전 테라피로 다른 러너들은 어떤 것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달씨의 마라톤 전날은 작년에 이어 미술관이다.




충전


그림은 잘 모르지만 달씨에게는 좋아하는 대상이다.많은 그림을 보지 않고, 뭔가 하지 않더라도 잠시 앉아 쉬며 비우고 채울 수 있는 충전소 같은 곳, 미술관은 달씨에게 그런 곳이다.


두 여인은 스탠드글라스가 높은 천장 아래 텅 빈 소파에 앉아 쉬기도 하고, 그림들을 바라보며 앉을 수 있는 전시장 안의 의자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릇 접시 전시장에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달씨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아는 10대 소녀의 눈초리도 있지만, 마라톤을 하루 앞둔 한 엄마 러너의 충전을 도모하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시간이고, 지극히 완벽한 공간이었다.


달씨 충전소



충전이 다 되었다.

불안함, 조급함은 비워지고 이 귀한 시간의 감사와 온유로.


이제 탄수화물 충전 시간. 일본식 돈가스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자기 전 내일을 위한 준비들을 마무리하는 달씨. 우선 아픈 곳에 테이핑을 하는 것은 딸의 꼼꼼한 손을 빌렸다. 어깨, 햄스트링, 발까지 달씨의 딸은 동영상을 보며 정성껏 엄마 몸에 테이프들을 둘렀다. 지대한 수작업 후 마라톤 물품들을 챙겨 레디샷 놀이를 잠깐 한 후 불을 껐다.


"잘 자, 내일 새벽 5시에 나갈거야. 엄마가 내일 연락할게."

"응 엄마도 얼른 잘 자."



"어떤 날이 될까? 내일은.."

다행히 지난해, 마라톤 전날 밤 아드레나린 러시로 밤을 지새워야 했던 그런 밤은 아니었다. 호텔 주변의 고요와 어둠 그리고 이불속 평안 가운데 두 모녀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수고할 발을 위해 마사지팩 & 레디샷





*Melbourne의 외래어 맞춤법 표기가 '멜버른'인가 봅니다.

그렇지만 멜번으로 표기한 것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술관 내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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