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번/멜버른 마라톤 2025
된장솥밥 된장술밥
갑작스러운 세찬 비가 멜번의 저녁 공기를 단숨에 식혀버렸다.
"밥 먹으러 가자. 구수한 된장냄새 나는 백반이 먹고 싶어."
침대에 누워있던 모녀는 검색으로 찾은 가장 가까운 한식당으로 겨우 걸어갔다.
한눈에 들어온 메뉴, 된장솥밥을 주문했다.
그러나 식사가 나오자 잠시 멍해졌다.
솥밥이 아니네? 다시 보니 '된장술밥'이었다.
마라톤을 마치니 글자조차 흐릿하게 보일 만큼 피곤한 걸까?
완주의 안주거리
오늘의 완주자는 국을 한술 뜨더니, 딸에게 말했다.
"이 맛은 어렸을 때 엄마의 엄마가 해준 음식맛이야."
달씨의 인생 두 번째 마라톤을 마친 2025년 10월 12일 저녁,
멜번의 한 식당에서 딸과 마주 앉아 된장국에 고추장이 살짝 풀린 국을 먹으며 이야기할 줄 몰랐다.
"엄마 잘했어! 엄마도 자랑스러워? Are you proud of yourself?
"응, 완주한 게 자랑스럽고 기분 좋아."
달씨는 테이블에 마주 앉아 딸과 낮의 마라톤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당 밖 고층 건물들 사이로 여전히 비가 내렸다.
"멜번 날씨가 이래. 영국 날씨와 무척 닮았다고 표현하지.
그래서 사실 멜번 마라톤을 망설였어. 10월 둘째 주면, 운이 나쁘면 30도를 훌쩍 넘길 수도 있고, 비가 쏟아질 수도 있어. 알 수 없잖아. 그런데 오늘은 달리기 완벽한 날이었어. 구름 낀 하늘에 선선한 바람. 신의 선물 같은 날씨였어."
아무것도 바라지도, 예측할 수도 없는 상태로 새벽에 홀로 출발지로 갔던 달씨의 마라톤 이야기는 이어졌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시드니에서 온 아저씨는 오늘 첫 마라톤이며 완주가 목표라 했고,
"나도 그래"라고 말한 여전히 처음처럼 떨리는 두 번째 마라톤.
어두운 새벽, 출발지까지 말없이 걸어가던 러너들의 뒷모습,
여유 있게 나섰는데도 화장실을 3번이나 들러야 했고, 마지막 출발 10분 전 화장실 줄 맨 앞에 서있는 착하게 생긴 동양인에게 사정 얘기하니 흔쾌히 양보해 준 이야기, 그래서 겨우 출발선에 설 수 있었던 것.
다가올 길고 험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을 출발선에 섰는데, 혼자 속으로 외치고 본인도 놀란 말,
"재밌어!"
또 다른 화장실 이야기도 했다.
마라톤 등록에 노상방뇨 공식허가도 포함되어 있는 듯 앨버트 호숫가를 야외 화장실로 만든 남자 마라토너들의 뒷모습, 어찌나 급해 보이는지 땅으로 길게 늘어진 가로수 나무 사이로 뛰어들어간 어느 여자 마라토너. 그 와중에 'Need A Nappy?' 기저귀 필요하냐는 문구를 들고 있는 어느 센스 있는 아기엄마와 눈 마주쳐 빵 터진 이야기 등 수다가 시작되었다.
너로인해
그러다 달씨는 대뜸 딸에게 고맙다고 말을 했다.
"아까 달리다 네 말이 떠올라 눈물이 나더라.
힘들어서 하프까지만 할까 생각도 잠시 들었어.
그런데 네가 친구들에게 엄마는 '두 번째' 마라톤 한다고 말했던 게 떠오르더라.
한번 해보는 첫 번째 도전이 아니고, '마라톤 하는 사람'으로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그 말이 힘이 되었어. 그래서 버티며 결승선으로 다가가는 엄마 스스로도 대견했고.
결승선에서 혼자 기다릴 딸을 생각하니 힘내서 가자는 생각밖에 안 나더라."
필생즉생 必生則生
그랬다. 달씨의 42.195Km는 여러 굴곡점이 있었다. 초반 여유 있게 페이스를 잘 지키며 시작했다. 햄스트링에 온통 신경을 썼지만, 사실 첫 번째 복병은 복부경련이었다. 버려지는 물컵들로 환경에 너무 미안했지만, 물보급 지점마다 물은 꼭 챙겨마시는 달씨가 3번 혹은 4번째 물을 마셨을 때 배에 스티치가 일어났다.
"설마 맹장은 아니겠지?!" 할 정도의 통증이 생겨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러닝조끼에 물 가지고 조금씩 빨대로 먹나 보다."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복병은 발목, 후경골근건이 다시 아파지기 시작했다. 이도 20Km 지나 적응되었을 때쯤 마지막으로 햄스트리닝님이 오셨다.
굴곡 없는 풀코스가 어디 있으랴. 발이나 다리에 통증을 느끼는 제스처를 하는 러너들을 보며 혼자가 아니구나 하며 레이스를 이어나갔다고.
"그런데도 엄마 PB(개인기록) 만들었어?"
딸이 물었다.
"부상 심해지지 않으려고 나름 원칙을 정했어.
최대한 보폭을 짧게, 무릎은 일자, 되도록 미드풋 착지가 되게 달리자, 다리가 당기거나 오르막에서는 무조건 걷자. 그랬더니 케이던스도 올라가고, 의도치 않게 나에게 맞는 스트라이드를 찾게 된 것 같아.
시계를 몇번이나 봤어. 고장난 줄 알고. 그래서 30Km에서 너에게 연락한 거야. 엄마가 생각보다 결승선에 일찍 도착할 같다고. 조금 더 욕심냈다면 기록이 더 좋았을 수도 있겠더라고. 그렇지만 기록보다 완주, 부상보다 즐기는 것이 목표였고 그거에 맞게 해서 좋았어."
살고자 하여 지켰던 것들이 살렸다. '필생즉사'라고 하는데, 달씨의 부상 중 달리기는 필생즉생이 되었다.
멜번 사람들 그리고 두번째 마침표
"엄마 오늘 재밌었어?"
"응, 재밌었어. 달리다 재밌는 응원 사인들을 많이 봤는데, 그중에 No Refund! Keep Going! 있었어. 돈 주고 하는 고생, 환불불가이니 계속 달리라는 거지. 주민들이 응원을 많이 나와있었어. 꼬마들이 젤리랑 사탕도 주고, 얼음이나 아이스블록 들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도 많았어. 어떤 할머니는 독한 술, 테킬라를 주려는데 누가 먹었는지 궁금하네."
"코스는 시드니 보다 덜 지루하고 좋았어. 바닷가든 도로변이든 응원하는 사람들이 생기 있고 많아서인가 봐."
딸은 결승선에서 기다리고 있다 엄마를 찍은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MCG 경기장에 들어서 Finish Line까지 예상대로 군중의 환호를 받노라니 부끄럽기도 하고 감동스럽기도 했던 그 장면이다.
첫 마라톤에서 하지 못한 피날레, 양손을 들고 만세했지만 오십견으로 반만 올라가는 웃픈 장면. 그래도 달씨는 그저 신기하고 만족스러웠다. 두 번째 도전, 두 번째 마침표를 마무리했다는 것이.
러너의 열두달 농사
저녁을 먹고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새벽에 본 다시 시드니 러너와 마주쳤다. 둘 다 그때와 너무 다른 복장이었기에 멈칫했지만 힘들어하는 걸음걸이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마라톤 어땠어요?" 달씨가 물었다.
"생각만큼 잘하진 않았어요. 뒤에는 거의 걸었어요, 그래도 완주는 했지요."
"축하해요!"
그는 아마도 다음 마라톤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달씨가 그랬던 것처럼.
달씨, 첫 완주에서 두 번째 완주까지의 열두달을 보냈다.
제철에 해야 할 일들이 있는 농사처럼, 마라톤을 앞두고 제철에 해야 할 연습들이 있는 계절이 쌓인다. 농부들의 부지런함에 비할 수 없지만 러너들은 각자의 일상에서 시간을 챙겨 트랙이나 도로, 산이든 트레드밀이든 씨를 뿌리고 물을 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해충이나 자연재해로 농사일을 잠시 멈추듯, 러너들도 부상이나 다른 일로 연습을 잠시 쉬며 다음을 기약한다.
일 년 동안 차곡차곡 모은 시간과 노력들이 추수의 즐거움과 보람이 되는 것처럼, 마라톤을 준비한 러너들에게도 그러한 시간이 돌아온다.
한 번 한 번의 마라톤을 통해 기록의 기쁨보다 작은 성장의 이삭을 추수한다. '나'라는 사람을 더 알게 되고들여다보는 거리가 된다. 중년 러너의 열두달 농사는 양(속도)보다 아주 작지만 의미 있는 성장점에 있지 않을까. 적어도, 달씨에게는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