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맥주는 마시고 싶어
기분: 바람(windy)
‘퀴블러-로스’ 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로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이라고 정의하였는데 이 이론은 죽음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슬픔을 받아들일 때도 적용된다. 현재 나의 상태는 1단계, ‘부정’ 상태이다.
동네병원에서 유방암 이라는 판정을 전화로 듣고 보험사에 유방암 진단금에 대해 문의 전화를 하면서도 유방암 이라는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나는 여전히 저녁이면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일단 오늘은 마시자! 하며 코끼리가 그려져 있는 뚱뚱이 작은 맥주캔 355ml 2개를 순삭 했다.
이 좋아하는 맥주를 어떻게 안 마실 수 있을까?
맥주를 마시고 잠에 들었고 다음 날 아침 검사결과를 들으러 동네병원에 갔다.
전화로 유방암으로 진단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와 달리 의사를 직접 만나 촬영한 CT를 보며 설명을 듣고 K보험사와 S대학병원에서 필요로 하는 서류를 챙기면서 조금은 내가 암환자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 날 집에 와서 냉장고에 있던 맥주 8캔 중 4캔을 꺼내어 주방 싱크대에 콸콸 쏟아 버렸다.
대학병원 교수님께서 아직 나에게 유방암 이라는 진단을 내리기 전이고 각종검사를 진행 중에 있어서 맥주 4캔은 차마 버리지 못하고 남겨두었다. 유방암이 아니라고 하면 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거잖아! 라며
그리고 인터넷 검색창에 유방암 환자가 술을 마셔도 되는지 찾아보았다. 의외로 가끔 맥주 1잔 정도는 괜찮다는 긍정적인 답변이 눈에 들어왔다. 무알콜 맥주는 맛이 없어서 손이 안 가고...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했지만
맥주는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고 나서 하루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오랜 나의 친구 같은 존재였다.
맥주를 대체할 수 있는 음료를 찾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달달한 디저트를 그리 좋아하지 않고 치킨이나 햄버거를 먹을 때도 난 콜라나 사이다를 먹느니 그냥 물이 좋았다. 내 돈 주고 탄산음료를 사먹은 기억은 더운 나라를 여행하다 갈증이 났을 때가 유일했다.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탄산수’ 가 떠올랐다. 레몬맛 나는 탄산수를 사서 마셔보니 단맛이 많이 났다.
평소 생레몬도 그냥 씹어 먹을 정도로 신거를 잘 먹는 나는 레몬을 한 봉지 사서 조각 낸 후 아무것도 섞지 않은 플레인 탄산수에 넣어 마셔보았다. 청량감은 맥주와 비슷했으나 보리의 쌉싸름한 맛은 어찌할 것인가?ㅠㅠ
그리고 탄산수의 단점은 맥주처럼 한 번 따면 다음날 급속도로 탄산이 푹 죽었다. 그래서 페트병 보다 가격이 비싸지만 캔에 들어있는 탄산수만 구매했다.
그렇게 맥주의 완전한 대체제를 찾지 못하였지만 플레인 탄산수가 그나마 내 입맛에 맞아서 몇 번 마시다가 완전히 맥주를 끊었다. (참고 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거 같다.)
그러다 유혹에 넘어갈 뻔 했는데 여행을 마치고 숙소에 도착해서는 오늘 하루의 피로도 풀 겸 맥주 생각이 간절했지만 꾹 참았다. 지금은 맥주의 자리를 각종 허브차들이 섭렵했고 그렇게 맥주와 이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