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울레이의 십자가 언덕을 거쳐 버스를 타고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입성한 우리는 올드타운에 여장을 푼다. ‘라트비아’라는 작은 표지판 하나 붙어있는 것 밖엔 아무것도 없는 국경을 타고 있던 버스가 그대로 달리며 통과하는 것을 보며, 불과 6개월 전 다친 다리를 이끌며 힘겹게 페루의 국경을 넘어 볼리비아로 들어가던 순간이 버스 창에 스친다. 같은 시각 한국에서 허리를 삐끗한 후 한동안 어디에도 나다니려 하지 않던 엄마는 지금 리투아니아를 거쳐 라트비아에 와 계시는구나. 확 넓어진 시야와 현대적 분위기의 리가.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려던 찰나 리가의 젠틀맨이 나타난다. 숙소를 찾으며 도심의 계단을 캐리어를 끌고 가는 엄마에게 어느새 어디선가 나타난 한 남자가 말도 없이 스으윽 엄마의 캐리어를 낚아채 계단 위에 올려다 주고 사라진다. ‘어머나!’ 심쿵한 순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이후 어디서나 엄마의 무거운 가방을 말없이 운반해 주고 제 갈 길 가는 리가의 남자들을 수차례 만날 수 있었다. 외모도 인품도 멋진 ‘젠틀맨’이 리가엔 수도 없이 많다.
리가에는 젠틀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정 많은 할머니도 많다. 시굴다 가는 버스를 타는 곳을 길거리에 나와 계시던 할머니에게 “시굴다! 시굴다!” 하며 물었더니, 이곳이 아니고 반대 방향에서 타야 한다고 손짓으로 알려주신다.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길을 건너 맞은편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돌아다 보니 버스 정류장의 위치를 알려주신 할머니가 목을 빼고 이쪽을 쳐다보고 계신다. 제대로 찾아가는지 조바심이 나셨던 모양이다. 룬달레 궁전을 찾아갈 때 탄 버스의 할머니들은 또 어떻고. 룬달레 궁전으로 가는 버스를 타니 할머니들 네댓 분이 타고 계셨다. 일행인 분도 아닌 분도 계셨다. 확인 차 “룬달레?”라고 할머니들을 향해 물어보니 모두들 맞다고 하신다. 15분 남짓 지나 곧 룬달레 궁전 정류장이겠다 싶었는데 웬걸 그 할머니들이 모두 우리를 향해 “룬달레, 룬달레”하며 외치신다. 나는 잊고 있었지만 그분들은 계속 우리를 생각하고 계셨구나. 우리가 제대로 내려 찾아가는지를 보려고 차창에 고개를 대고 끝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으시던 라트비아의 할머니들. 가슴이 따뜻해진다.
어디를 가도 차창 밖으로 산을 볼 수 없다. 가늘고 곧게 쭉쭉 뻗은 나무들과 노란 꽃들이 보일 뿐이다. 국토의 70프로가 산인 나라에서 살아서일까. 확 트인 지평선을 볼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다. 어디를 가도 깨끗하고 공원의 조경과 나무가 잘 관리되어 있다. 시굴다 성에서 내려오며 평화로운 마을의 아름다운 공원에서 한가롭고 여유 있게 지내는 사람들을 보며 ‘이 나라에서는 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엄마는 나보다 더 그곳에 매료된 듯 보인다. 시굴다 성 근처의 마을에 푹 빠져 그곳을 음미하느라 천천히 걷고 있는 엄마를 뒤에 남겨둔 채 나는 먼저 기차역에 도착한다. 시계를 보니 마지막 기차 시각이 가까워 오고 있다. 천천히 걸어오는 엄마를 향해 기차 시간 다 되었다고 손짓하며 외친다. 조마조마하다. 과연 기차를 탈 수 있을까. 나의 외침을 들은 엄마가 뛰기 시작한다. ‘와!! 엄마가 뛰어오신다.’ 그리고 정말 아슬아슬하게 기차에 가까스로 오른다. 5:11 p.m. 숨을 몰아쉬는 엄마와 함께 자리에 앉는 순간 출발하는 기차의 차창을 바라본다. 너무 행복하고 감사하다. 1시간 10분이 걸려 리가에 돌아오며 엄마한테 물어본다.
“엄마, 이 나라 어때?”
“나는 여기서 아예 계속 살았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