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rosi Jan 27. 2024

죽으려다 '이거' 합니다

살고싶어서요

엄마는 실종됐다. 2010년 1월 7일, 그 날로 다시 볼래야 볼 수 없었다. 겨울이 한창이라 밟을 맛 나도록 눈까지 소복이 내렸고, 3개월이라 짧게 남은 여생을 살고 있던 아빠에겐 이곳 저곳 전이되어 딱히 폐암이라 하기도 어려워진 병은 이제, 둘째 문제가 되고야 말았다.


겨울 나무 마냥 앙상해져 땅에 발을 딛어본 지 오래 지난 데다, 기저귀까지 차고 아내를 찾으러 다니기엔.. 악물 치아도 성치를 않았으니까.


무력했다. 20대 여직 철도 못든 딸에겐 죄다, 그리 비춰졌다. 다 큰 딸 아이가 혈변 본 엉덩이와 성기를 구석구석 씻겨 주어도 민망하기 어려웠던 아비는 그랬다. 더는 성치않은 목으로 내는 갈기갈기 찢긴 목소리가 그랬다. 곁에 있을 때 잘하질 못한 걸 이제야 후회하나 싶게 애절하게 부르다 울기를 반복했다.무력한 당신.

잃어버린 소 부르듯 '수진이'를 부르며 울다말고, 발가 벗겨진 아랫도리를 그제야 알아 차린듯. 거짓으로 물이 차갑다며 욕지거리를 . 아는 욕이 바닥이 난 건지, 진정 내게 미안했는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목욕의자에서 자력으로 일으키지도 못하는 몸을 겨우 기울이며 딸에게 용서를 구했다. 감히 따라 울지를 못했다.

 당시 나는 주로 불운한 아이로 불리던 여중생 시절의 습관을 다시 상기하며 홀로 소리없이, 그리고 짧게만 울었으니까.



나도 많이 아팠다.

의식을 잃는 날까지 끝내 부르기만 하다가. 아무래도 이승 수진이가 없는 게 분명 하다더니, 같은 해 5월 저승으로 찾으러 간 게 끝이었다. 찾았을까?



여름을 날 때까지 내 병은 주로 악몽으로 간주되다 말았고, 날이 선선해지니 정신에도 바람이 일었다. 몸과 마음이 함께 아프기 시작하면 난감해지기 마련이다. 대개 애도를 방해한다. 정확했다.

그 후로 오랫동안 한결같이 아프기바빠 애도하는 법을 알지 못한건 매한가지다.


아직 나는 궁금하다.

부모를 잃는다는 '몹시 흔한 사건'이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내 마음을 찢어발겨 훼손했길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내가 다시 엄마라는 직함을 얻기까지...   미쳐놓고도,  미치지 않은 척하며 죽어살게 했는가 말이다.


 안다는 사람조차 알기 어려운 나의 유년시절.

여전히 찾지 못해 절절히 그리운 ... 엄마.

고비고비 숨이 찬 탓에

멋대로 돌았고, 함부로 슬펐다.


이거면 가여히 여기기에 충분하다는 듯 나를 본다.

길을 가다 인도에 걸터 앉아 얼굴을 묻고 울었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가, 어린아이가, 노인이.

나를 그리봤다며 미쳐 날뛰어 울었다. 그당시 나는 그냥 미친년이었다.


의학의 실패를 목도하고,

그것으로 가능한 병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데에

꽤 오랜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음을 회복하는 노선의 마지막 경로가 결국 나의 선택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어쩜, 강산이 변했다.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을 무심하게 툭툭 던지는 일이 내게 필요했다. 숨겨지지 않는 의구심과 억울함. 살아온 날들이 몹시 억울해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면 맞는 표현일까.


죽으려던 나에게 들숨을 불어 넣어 준 인연들.

깊게 패인 상처도 최초의 깊이를 지켜내진 못한다는 걸. 절대 낫지 않을거라 책망해도 기필코 아무는 게 순리라며. 도무지 들어먹질 않는 나를 묵묵히 기다려준 사람들.


이불을 동굴삼아 우울을 잊으려고 뜨거운 여름에도 동면하듯 눈을 감고 잠만 청하던 나였다. 안다.


이제 나는.

죽지 않으려고 몸을 움직인다.

그러려고 운동도 한다.


갑자기 홀연 떠날 이유도 없어 좋고.

끝을 정해두지 않아서 안심해도 좋을 일이

내게 운동이다. 재미만 있으면 지칠 때쯤 멈췄을 텐데.. 의미까지 있는 바람에 계속하기를 선택한다.


이 좋은 걸.

기어이 사람 살리는 이것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만 잘 살 까닭도 없기에 이제

글도 쓴다.



이전 01화 새벽1시, 레깅스를 챙기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