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교사들에게만 지우는 의무같아 서늘하다. 세대를 아울러야 하는 적응력으로 수업을 하되, 때에 따라 민감함과 둔감함을 동시에 발휘하는 극단을 넘나들 줄 알아야 버티나 싶다.
아, 이러다 결국 나도 곪아 터지지나않을까?
23년 여름, 서이초 참사(사건보다는 참사가 낫겠다) 이후, 줄곧 탑스타도 아니면서 학구안에선 모자를 눌러쓰고 다녔다. 바닥을 향해 내리깐 모자 챙만큼이나 마음도 힘껏 눌러내며.
오전, 오후할 것 없이 낮 두 세 시나 되어야 맞이할 법한 당 떨어진 몰골을 하고는 종일 꾸역꾸역 견디는 동료들 표정이 용케도 읽혀 괴로웠다.
애먼 사람에게 하는 화풀이 수준의 민원은 일상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후배들은 본인이 선배인냥 소매 걷어 올리고 매번 학교 일에 곁을 내주곤 했는데.
주사위를 던질지 말지 수 년 간 고민을 거듭하던 그들도 단숨에 의원면직이라는 이름으로 작별을 고했다. 경기도교육청 소속에서 서울시교육청 또는 고향집근처로 가고자 임용을 다시보던 이들과의 이별과는 사뭇달랐다. 이번엔 그간 내어 주던 곁을 주섬주섬 챙겨 뒤도 안돌아보고 떠났다. 아쉬워못돌아봤다기보단 안돌아보는 편이 나은 공간이 되어버렸데도 선배로서 해줄말이 없어 미안하다. 그래, OO쌤. 잘했다.
눈물로 배웅하는 선배는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일상을 여전히 살고 있다.
떠나간 그녀들과 나누던 상큼발랄한 티키타카가 그리워 고학년으로 올라온지 한 학기.
으아~ 사춘기 아이들, 역시 다루기 어렵다. 다룬다는 표현이 조금 거칠어 마음에 차지 않지만 보통 그리들 말한다. 사춘기 아이들의 부모들도 어렵기는 매 한가지. 그럴수밖에.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제3세계 속 부모노릇? 고되리라.
학부모에게 괜찮은 담임교사가 되고자 하는 나의 마음을 비웃던 한 선배교사가 냉수를 떠다주며 굳이 커터칼로 새기듯 해주던 말.I got it!
윤미쌤, 학부모님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버려. 그건 말이지. 시엄니한테 좋은 며느리 돼보려는 심산이랑 또옥~ 닮은거다. 십중팔구 실패야.
귓등으로도 안듣다가 어깨만 으쓱 했을 뿐, 이유는 물은적없으나 선배는 열심히다.
왜냐고 묻지도마! 그냥 그렇게 되어 있어~ 포기해.
열 번 찍어 보는 노력도 없었는데 포기까지 하라니 허탈하면서도 영 외면하기도 어렵다. 차라리 다루기 힘들다는 아이들의 마음을 얻기로 했다. 대개 성공인데 어째 5, 6학년을 맡을 때면, 라떼보다 10배는 강력한 갈등 상황에 놓이기도 여러차례.
그래서 아이들과 운동을 한다. 내가 꼬박꼬박 챙겨하는 스포츠클럽 시간과 담임 체육이 시간표에 박혀있는 날이면 영락없다.
이 반 애들은 때려서 청소 시켜? 왜 이렇게 죽자고 바닥을 닦아?
소릴 꼭 듣는다.
집에서도 너희들 방청소 이렇게 열심히 해?
라는 질문에는 어떤가?
"설마요. 또는 전혀요." 라고 능청을 떠는 아이들은 언제 예민하게 눈을 흘기고, 죽자고 반항했나 싶게 환경 미화에 돌연 힘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