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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사는 진단했고, 나는 말에 다쳤다

오진보다 깊었던 말의 상처, 내가 회복해온 언어의 여정

by 송이

2025년 4월, 병원으로부터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OO정신의학과가
OO으로 이전 개원하였습니다.”

“OOO원장님의
신간 도서 출간 기념 무료 증정…”


그 문자를 읽는 순간, 가슴 한쪽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그 병원에서 약 관련 문의를 했다가 한 달 만에 내쫓긴 환자였다.




2024년 7월, 프리랜서로 일할 땐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직장이라는 구조 안에서 업무를 하다 보니,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작업 기억력의 한계, 충동적인 행동들. 결국 일은 마무리했지만, 선택과 집중을 통해 효율적으로 해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즈음 받은 CAT 검사 결과는, 성인 ADHD였다.


그 진단을 받고 나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이유를 알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시작된 약물 치료는 오히려 내 일상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처방받은 약에는 메디키넷 리타드(20mg)를 포함해 항불안제, 항우울제, 수면유도제까지 총 6가지 약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처방받았던 약 목록 (일부 발췌, 병원 정보는 편집했습니다.)



물론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 내 몸에서 일어난 변화는 예사롭지 않았다. 며칠 뒤부터, 의지와 상관없이 엄지발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잠에 깊이 빠진 순간에도 내 발가락은 마치 작은 틱처럼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마침 친구들과 2박 3일간 휴가를 함께하고 있었다. 새벽마다 내가 자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친구들이 “너 발가락 계속 떨리더라”고 말했다.

새벽마다 내가 자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친구들

그 말을 들은 다음 날, 잠에서 깨자마자 엄지발가락이 뻐근하게 굳어 있었다. 걷는 것조차 불편할 만큼. 이상하다고 느낀 건 바로 그 순간부터였다. 단순한 근육 피로나 일시적인 증상이라기엔 너무도 명확하고 지속적인 신호들이었다. 게다가 그 시기, 잠드는 것도 어려워졌고, 자는 동안에도 자주 깼다. 식욕은 점점 줄어들었고, 기분은 특별한 이유 없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병원을 찾았다. 이런 증상이 혹시 약 때문일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들은 이랬다.

“처방해 준 약 하루 세 끼 안 먹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이런 부작용은 제가 진짜 처음 들어서 그래요. 제가 먹으라는대로 세 끼 다 먹지도 않으시고 부작용이 있다고 하는건 약 부작용이 아닌거죠."

"그리고 불안하시잖아요 지금. 그래서 이 약들 처방해준거예요."

"OO씨 말만 들었을 때는 솔직히 못 믿겠어요."

그 날, 진료실.

나는 불안하다고 말한 적도, 그런 상태였던 적도 없었다.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의사는 얼굴을 붉히며 내 이야기를 일축했다. 그리고는 진료의뢰서를 써주며 신경과에 가보라고 했다.


그런데, 진료실에서 나와서 받은 진료의뢰서에는 ADHD이외 내가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는 진단명들이 적혀 있었다.

F320: 경도 우울 에피소드
F318: 분류되지 않은 기타 정신질환 검사
F900: ADHD
R251: 진전(떨림)
Z004: 검사 목적
Z719: 상담 접촉
환자 동의 없이 포함된 진단명이 적힌 진료의뢰서


종이를 받아든 순간, 내 상태를 내가 아닌 타인이 정의하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고 무서웠다. 나는 우울하다고 말한 적도 없고, 양극성 장애를 의심할 만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한 적도 없다. 그에 해당하는 어떤 검사도 받은 적 없었다. 실제로 그렇다. 당시 내가 원했던 건, 단지 주의력을 높이고 충동성을 조절해 일을 더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특별히 우울하거나 불안한 증상은 전혀 없었다. 병원 진료 전, 환자에게 미리 보내는 상태 체크 문진표에도 그런 정황을 예측할 만한 항목은 하나도 없었다.


방법을 몰라 찾아간 병원에서마저 내쫓기고 나니, 다시 다른 병원을 찾아갈 용기도 나지 않았다. 여러 부작용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불편함을 느꼈던 ‘발 떨림’은 약 때문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스스로 결단했다. 약을 끊기로.

그리고 놀랍게도, 약을 끊자 부작용은 말끔히 사라졌다. 떨림도, 식욕 저하도, 밤마다 날 깨우던 움직임도.

나는 그때부터 약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논문과 의약품 정보, 신경계 반응 보고서까지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확인했다. 메디키넷을 포함한 메틸페니데이트 계열 약물은 드물지만, 분명하게 불수의적 움직임, 틱, 진전 같은 신경계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고. 나의 증상은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의사 덕분에,참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약에 대한 의지를 끊고 스스로 충동성을 조절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날 병원 문을 나서며 느꼈던 상실감이, 아이러니하게도 내 회복의 출발점이 될 줄은 몰랐다.

약 없이 스스로를 조율하기 위한 훈련을 하는 나

머리를 많이 써야 하거나, 주의력과 정리가 필요한 업무가 있을 때면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 일찍 헬스장에 갔다. 몸을 움직이며 뇌를 깨우는 루틴이었다. 그리고 알게 됐다. 아침에 마시는 한 잔의 커피가 생각보다 내 뇌를 빠르게 깨운다는 것.


‘나’라는 사람의 사용설명서를 하나씩 써 내려가듯, 작은 변화들을 꾸준히 관찰하고 기록했다. 어떤 상황에서 브레인 포그가 오는지, 무엇에 스트레스를 가장 크게 받는지, 반대로 어떤 작업에 몰입할 때 시간 가는 줄 모르는지를 분석하며 나만의 리듬을 찾아나갔다.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빠르게 시각화하기 위해 매일 하루에 하나씩 콘텐츠를 만들어보았다. 선택과 집중, 그리고 완성까지의 흐름을 의식적으로 훈련했다.


일상을 루틴화하며 인지의 습관을 만들었고, 어느 구간에서 번아웃이 오는지도 파악했다. 그에 따라 무리한 스케줄은 학원 측과 조율하며 나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일정을 다시 설계해나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나는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았던 ADHD의 특징들을 하나하나 스스로 공부하고 이해했다는 것이다. 뇌 기능, 충동 조절, 작업 기억력, 감정 조절, 시간 왜곡. 그 모든 개념들을 책과 논문, 영상과 사례를 통해 배워가며 ‘진단명’이 아니라, ‘진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을 보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건 약 없이 나를 조율하기 위한 훈련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 병원에서 도착한 문자 한 통이 그날의 기억을 다시 불러왔다. 나는 용기 내어 답장을 보냈다. 감정을 배제하고, 정중하면서도 분명하게 내 이야기를 담았다. 그 병원으로부터 이전 알림과 원장의 신간 소식을 받게 된 것이 개인적으로 유감이라는 뜻도 전했다. 그리고 답장 마지막엔 내 마음속에 가장 오래 남았던 말도 함께 담았다.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사람을 대하는 분들이야말로 말의 무게와 책임을 더욱 깊이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릴 수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지요. 그리고 저는 지금, 그 ‘말’을 다루는 일을 하고 있기에 더욱 절실히 말씀드립니다.
병원 이전과 책 출간, 축하드립니다. 사람이 사람을 바꾸는 것은 어려울지 몰라도, 상처 입은 마음에 더 깊은 상처를 남겨서는 안 됩니다. 환자가 스스로 자신을 돌보고 바꿔갈 수 있도록, 자립을 돕는 '제대로 된 코칭의 말'이 필요합니다. 건승을 빕니다.
병원 이전 안내 문자에 보낸 나의 응답 메시지


나는 지금, 말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스피치 강사로서,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일상과 감정, 그리고 자존감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매일 실감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그날의 말을 잊지 못한다. 약보다 더 깊고, 더 오래 남았던 말의 상처를.


‘내가 겪지 않았으니 그럴 리 없다’는 말, '내 처방이 옳다’는 확신.
그 안일함 속에서 나는 오히려 말의 본질을 배웠다. 자립을 돕는 말, 존중을 담은 말, 치유를 향한 언어. 그것이야말로, 전문성을 갖춘 사람들이 사람을 대할 때 가장 먼저 지녀야 할 태도가 아닐까.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사람을 다루는 말의 온도에 있다고 믿는다.



신간 도서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픈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하는지도 그 안에 잘 담겨 있기를 바랍니다. 그날 제가 받았던 말처럼요. 약보다 더 아팠고, 더 오래 남았던 그 말. 그 덕분에 저는, 말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직접 온몸으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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