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이라는 우주, 나라는 중심
방이라는 우주, 나라는 중심
서른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내 방이 생겼다. 처음으로 방문을 잠글 수 있는, 온전히 나만의 공간. 태어나서부터 서른이 되기 전까지, 엄마와 가장 큰 방을 함께 썼다. 서러웠냐고? 감정도, 가져봤다가 뺏겨본 경험이 있어야 느낄 줄 안다. 서러움도 속상함도 또 필요성도 못 느꼈다. 그래서 난 가엾게도 바랄 줄도 몰랐다.
그러던 서른이 되던 해, 오빠가 결혼으로 출가를 하게 되며 나는 처음으로 나의 방을 갖게 되었다. 엄마는 나보다 먼저 내 방을 채울 가구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화장대, 침대, 조명... 하지만 나는 이상하리만치 무덤덤했다.
“굳이 화장대가 필요할까?”
“그냥 대충 고르면 되지 뭐.”
그때까지만 해도 ‘내 방’이라는 말이 실감 나지 않았다.'내 방' ' 내 공간'을 가져본 적 없던 나는, 내가 어떤 걸 좋아하는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애초에 가져본 사람이야, 부릴 줄 안다고.. 가져본 적 없던 나는 공간을 생각한다는 그 생각 자체가 어려웠다. 잘 그려지지가 않았다.
매우 굼뜨게 있던 나를 보며 엄마는 계속 채근했다. 엄마의 채근이 귀찮아 ‘내 방’이라는 곳에 무언가를 집어넣으려 열심히 검색했다. 그러다 처음으로, 내 방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의 공간을 들여다보고, 유행하는 가구와 인테리어를 살펴보면서 조금씩 감각이 생기기 시작했다. 막연하던 ‘취향’이라는 것이 실제로 구현 가능한 무언가가 되자, 나는 그제야 비로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매일매일 그렸다.
가구의 위치, 벽지의 색, 창가에 놓일 화분, 그리고 그 안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나.
하나씩 채워지는 방을 바라보며, 나는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리고 조용히 깨달았다. 공간이 나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예쁜 테이블 하나, 값비싼 베딩, 나무 향이 나는 캔들, 수납력 좋은 서랍장 하나까지도 모두 애정을 담아 골랐다.
이 공간 안에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홀로 울고 웃고 밤을 새우고 고민을 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다시 웃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공간이 생기기 전에는,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나 거센 비가 올 때에나, 밖을 헤매며 이 모든 것을 했었다. 어떤 날은 나만의 공간과 시간을 갖고 싶어 집 앞 벤치에서 혼자 긴 시간 소주를 마신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내 공간이 생기며 마음 놓고 울 수도 웃을 수도 있게 된 것이다. 맘껏 웃고 울 수 있는 공간이 생기자, 새벽을 헤매던 긴 ‘방황’도 점점 그치게 되었다.
내 공간이 처음 만들어진 2020년 겨울, 그리고 나의 공간이 너무나 익숙한 2025년 봄, 나의 공간을 꾸미는 과정을 경험하며, 나는 동시에 내면의 공간을 정돈해 나갔다. 취향을 알아간다는 것, 결국 나를 알아간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꿈꾸는 사람인지 그건 하루아침에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 방에서 무언가를 들이고, 무언가를 내보내는 과정을 반복하며 나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 자신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며 방은 점점 나를 닮아갔고, 나는 점점 단단해졌다. 단단해진 만큼 공간 안에서 느끼는 안정감도 커졌다.
그렇다. 공간은 곧, 나였다. 공간이 중요하다는 건, 결국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늘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 그 단순한 사실을, 참 오래 지나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공간이 마땅치 않아 밖을 헤매던 나는, 나를 스스로 세우지 못해 계속 방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야 비로소 내 중심이 세워지자 안정된 상태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나를 그토록 무섭게 했던 공황 장애도,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던 우울의 깊은 그림자도. 나의 따뜻하고도 단단함이 들어서자 이젠 비추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참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내 공간' '내 방' 이름을 갖지 못했을 때에도, 공간이 텅 비어 있어도, 때론 공간이 많이 어질러져 있어도, 공간을 비우고 정리하고 또 채우며 꿋꿋하게 지내온 나에게 고맙다. 포기하지 않고, 살기 위해 그 자리에 늘 있어준 나에게 눈물겹도록 고맙다.
방이라는 작은 우주 안에서 우리는 매일 나를 조금씩 만들어갑니다.
복잡한 하루엔 한 곳만 정리하고, 지치고 흔들릴 땐 베개 커버를 바꾸고, 마음이 흐려질 땐 향기로 나를 다시 깨워보세요.
공간을 다듬는 일은, 결국 나를 돌보는 일이니까요.
오늘, 당신의 공간에 어떤 작은 변화를 넣어주고 싶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