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을 못 하는 걸까, 말하려는 내가 두려운 걸까.
“왜 이렇게 긴장이 되죠…?”
수업이 시작되고, 말을 꺼내기도 전 입을 떼기 어려워하는 수강생들이 있다. 말이 아니라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사람들이다. 입술은 굳고, 눈은 흔들리고, 어깨는 경직되어 잔뜩 뻣뻣하다.
그들에게 나는 물어본다.
“무엇이 가장 어렵나요?”
그리고 그들은 말한다.
“그냥요. 말을 잘 못해서요.”
“평소엔 괜찮은데, 말하려고 하면 아무 말도 생각이 안 나요.”
하지만 그 ‘그냥’이 ‘그냥’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를 들키는 게 무서워요.‘
‘틀린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요.’
‘애써 쌓아 올린 나의 무언가가, 한순간 무너질까 봐.’
말이 막히는 건, 마음이 막히는 순간이다. 수많은 수강생들을 만나며 나는 하나의 공통점을 본다.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다. 말을 꺼낼 수 없는 것이다. 연습도 충분했고, 할 말도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말이 나를 드러낼까 봐, 그 드러남이 누군가에겐 실망이 될까 봐, 도망치듯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말하다가 내가 틀릴까 봐 무서워요.”
“쓸모없게 들릴까 봐 걱정돼요.”
“제가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면 어쩌죠?”
그 말들 속에 숨어 있는 건, ‘말의 실패’가 아니라, ‘존재의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긴장을 만든다. 그래 그 인정 욕구.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크면, 우리는 타인의 기준 속에 스스로를 가둔다. 말을 잘하고 싶은 게 아니다. ‘인정받을 만큼의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말 앞에서 우리는 작아진다.
‘이 말을 하면 괜찮을까?’
‘이 정도면 실망하지 않겠지?’
‘나는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이 생각은 감정보다 몸으로 먼저 반응한다. 심장이 빨라지고, 손끝이 차가워지고, 눈동자가 흔들린다.
긴장은, ‘틀릴까 봐’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버려질까 봐’ ‘미움받을까봐’생기는 감정이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에리히 프롬
우리가 그렇게 두려워하는 ‘미움’은 사실, 사랑과 아주 가까운 감정이다. 사랑과 미움을 함께 아우르는 ‘애증’이라는 단어가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니다. 서로 상반된 감정 같지만, 그 둘은 때로 같은 심장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미움’은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뒤틀린 감정이고, ‘사랑’은 미움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품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말도 가능하다. “미움은 사랑받을 용기이고, 사랑은 미움받을 용기다.”
... 그런데, 지금 말 잘하는 법을 배우러 왔는데, 왜 갑자기 답도 없는 철학 얘기냐고? 맞다. 스피치가 말의 기술이라면 이런 얘기는 어쩌면 너무 멀리 돌아가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의하기 어려운 사람의 행동을 과학의 언어로 풀어내려 했던 심리학조차도 결국 이런 결론에 다다랐다. 말 앞에 선 인간은, 결국 ‘존재’와 ‘관계’ 앞에 서 있는 존재라는 것.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믿는다. 아니, 믿고만 싶어진다. ‘미움’은 곧 나라는 존재의 거절이라고. 그래서 말 앞에서 자꾸만 작아진다.
“나를 미워한다는 건,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 믿음은 곧 ‘내가 나로서 살아도 괜찮은가’라는 존재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미움받을 용기란,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안아주는 일이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내 삶의 무늬와 온도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존재라는 확신. 그 확신이 있어야, 말 앞에서 버티는 용기도 생긴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세요?”
한 마디 떼기도 어려워하던 수강생에게, 나는 이렇게 물었다. 30년 넘게 교직에 몸담아오셨고, 장학사 면접을 준비하며 몇 번의 실패를 겪고 무너진 마음으로 내 앞에 오셨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들과 함께하며 힘들어하던 그분. 속 이야기를 꺼내게 하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하고자 하는 진짜 이야기를 하게 했다.
그 질문 앞에서, 그는 긴 침묵을 택했다. 말을 하지 않는 그 시간이 그분의 삶만큼이나 깊고, 무거웠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짧지만 단단한 말속엔 그 사람의 지난날과 믿음, 그리고 용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 또한 그 변화가 두려운 사람임을 스스로 인정한 후, 조용히 꺼내던 그 말은 그 어느 때보다 대담하고 확신에 차있었다. 말의 목적을 ‘누군가의 인정과 시선’으로 두지 않고, ‘나에게도 발견할 수 있는 한 부분‘, 나에게도 말해주고 싶은 말’이라고 전환했기 때문이다. 스피치 주제와 말의 의도를 ’나‘로부터 찾아나가게 된 결과다. 어떤 구간에서는, 떨림이 있었지만 그것은 긴장으로 인한 떨림과는 멀었다. 진심을 전하며 생기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떨림이었다. 그 마저도 찰나였다.
"방금 말씀하시면서 어떠셨어요?"
“전엔 어떤 말을 써야 하나, 정답을 생각하면서 말하려 했거든요. 그래서 자꾸 끊겼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방금은 편안했어요.”
말하는 게 어려운데도, 그분은 평생 ‘말’을 직업으로 삼아 살아오셨다.
“누군가 앞에서 이렇게 제 이야기를 많이 해본 건 처음이에요. 평생 할 얘기 다 한 것 같고, 평소엔 떠올리지도 않았던 생각들이 막 올라와요. 그런 저 자신이 낯설고 신기해요.”
6개월 ㅡ매주 한 번씩 꾸준히 뵈었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그분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변화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봤다.
어느 날, 그분이 말했다.
“선생님은 제 자존감 지킴이세요. 정말 감사해요.
전엔 한 마디 꺼내는 것도 힘들었는데, 이제는 그냥 해보자, 실수하자, 몰라도 말하자… 그렇게 나가요. 그런데 장학사님들이 이제 제 말이 ‘다 들린다’고 하시더라고요.”
나는 웃으며 되물었다.
“긴장 안 되시던가요? 예전엔 말하다가 귀까지 새빨개지셔서 멈추곤 하셨잖아요.”
그분은 맑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네 희한하게… 이제는 긴장이 안 되네요. “
스피치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다. 살아온 인생이 스며든 말일뿐이다. 말을 통해 우리는 때로 자신을 잊고, 자신을 만난다. 그렇게 말하기란,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다시 품어주는 일이다. 그 떨림 속에 담긴 진심은 세상의 모든 발표 기술보다 강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떨리는 입술 앞에서 기다린다. 그가, 마침내 자신을 말하게 되는 그 순간을.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조용히 기쁘다. 나와 함께 세상을 향해 한 발 내디딘 당신의 용기가, 가슴 깊이 고맙고 찬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