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점에서 그렇게 변해버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해본 적도 누가 시킨 적도 없었건만 7남매 맏며느리라는 그 거창한 타이틀(?) 때문이었을까요. 결혼 전에는부지런과는 거리가 멀었고 내성적이고 살갑지도 못했는데 어딜 가나 내 몸은 부엌으로 향하였고 거침없이 그 집 며느리가 되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딸하나 아들 셋 4남매셨던 아버님 형제분들께는 첫 번째 며느리였기에 결혼과 동시에 그분들의 며느리여야했고요. 생신날이면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석유냄새가 풀풀 나는 시골버스를 타고 또 갈아타고 멀미에 시달리며 한나절이 지나서야 도착하곤 했지요. 숨도 돌릴새 없이 바쁜 시골일로 엉망인 주인도 없는 셋째작은어머니댁의부엌을 청소하고 쌀을 씻어 밥을 하고 식재료를 찾아 반찬을 만들곤 했습니다.
둘째 작은어머니댁에 가면 가까이에 있는 슈퍼에달려가 장을 보고 돌아와. 있는 양념들을 찾아서 어떻게든 식구들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한 분뿐인 시고모님은 딸만 일곱을 두셨으니 그 집 문을 들어서는 순간 하나뿐인 며느리로 앞치마를 들고 부엌으로 먼저 들어가야 했고요. 어디 가서 손님처럼 느긋하게 앉아서 밥상을 받아본 기억이 없습니다. 왜 그 시절에는 그렇게 살았는지요. 저만 그런 건가요. 아직도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고 젊어서였는지 그다지 힘들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잘한다 잘한다 칭찬해 주시며 예뻐해 주셨던 지금은 계시지 않은 시어른들이 가끔은 그립기도 합니다.
둘째 작은아버님 생신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땀을 뻘뻘 흘리며 기저귀 가방까지 둘러메고 집안에 들어서면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셨던 작은어머니. 숨 가쁘게 부엌으로 들어서면 밥그릇 2, 국그릇 2, 수저 2벌에 간장종지 하나만이 나와 있을 뿐깔끔하게 치워진 부엌에는 밑반찬 한 가지도 없이 휑하기만 했지요. 냉장고가 집집마다 없었던 그 시절, 작은어머니는유일하게 맛깔스럽게 담그셨던 열무김치를작은 항아리에 가득담아 그늘진 마루밑에 신줏단지처럼 보관해 놓으셨습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다른 찬거리는 보이질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슈퍼에 들러 장을 보아야 했지요.각종 식재료를 사다가 조물조물 무치고 지지고 볶아 한상을 차려드리면 그때마다 어찌나 맛있게 드시던지요. 그도 오래지 않아 세상을 달리하셨지만슬하에 자식이 없고 양자로 간 시동생은 미혼이었으니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는그분들이 떠나신 집에서 상갓집 음식을 하고 초상을 치러내야 했지요.
가끔은 그때 해놓으셨던 매콤하고 맛있었던 작은어머니의 열무김치가 생각나곤 합니다. 물론 한여름날 대문간 그늘진 곳에서 커다란 조롱박바가지에 잘 익은 열무김치를 보리밥과 비벼먹었던 어린 날의 기억도 있고요. 하지만 너무 오래된 탓인지 그 맛은 떠오르질 않고 다만 두 아이를 임신할 때마다 시어머니께서 해주시던 열무김치를 몇 사발씩 먹었던 기억만이 남았습니다. 오늘은 국물도 먹을 수 있게 내 방식대로 고춧가루 없는 얼갈이배추 열무김치를 담가보려고 합니다.
작년보다 늦어서인지 열무가 너무 크게 자라서 작은 단으로 한단과얼갈이배추가 연하니 맛있어 보여 큰 단으로 2단과 쪽파 한 단을 사 왔어요. 먼저 배추와 열무를 다듬어 주어야겠지요. 길이는 2~3cm 정도 조금 짧은 길이로 잘라서 3번 씻어 굵은소금 3 주먹으로 켜켜이 뿌려가며 절여주었어요. 쪽파도 다듬어주고 오이 3개도 먹기 좋게 잘라서 소금에 절였습니다. 그래야 물김치 속에서 무르지 않고 오래 먹을 수 있거든요. 이제 양념준비에 들어갑니다.
미리 되직하게 쑤어놓은 밀가루풀 1 공기와 배 1개, 양파 1개, 마늘 1 주먹, 생강 조금을 믹서기에 곱게 갈아 생수 1.5리터를 부어 고운 체로 걸러줍니다. 액젓 1스푼, 매실액 2스푼과 감미료 반스푼, 꽃소금 4스푼으로 간을 맞추고 당근 반 개를 곱게 채 썰어 고명처럼 넣어주는데, 매콤한 맛을 원하신다면 홍고추나 청양고추를 몇 개 썰어 넣어주셔도 됩니다. 쪽파도 끝부분만 열무길이로 잘라서 넣어주고 나머지는 김치통 크기로 남겨두었다가 중간에 맨 위에 덮어줄 거예요. 아쉽게도 넣어주면 향긋하니 맛있는 미나리를 빠뜨려서 오늘은 패스하겠지만 꼭 넣어주시길 권합니다.
그사이 한번 뒤집어 주었더니 30분 동안 잘 절은 배추와 열무를 살랑살랑 헹구어 물을 빼주고 절은 오이는 그대로 건져서 쓸 거예요.물기가 어는 정도 빠진 절인 열무와 배추를 국물과 모든 재료들을 합체하여 다시 한번 간을 보고 부족한 간은 소금으로 맞춰주면 되겠지요. 이렇게 해서 단 몇 시간 만에 후딱 김치가 완성되었습니다. 사진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살짝 누르면 국물이 자작한 정도로 올라오니 새콤하게 익으면 배추열무김치 국수말이를 해 먹을 수도 있어요. 나른해지는 봄날 해 드시면 입맛도 돌고 딱좋겠지요.
두 번째로는 쪽파김치를 해볼게요. 한동안 이영자 씨, 전현무 씨 등이 TV프로그램에서 쪽파김치 먹방을 해대는 통에 입맛을 다신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지난가을에 담갔던 파김치가 진즉에 떨어졌는데도 워낙 쪽파 한 단 사려면 배춧잎 한 장도 모자라기에 값이 내리기만을 기다리다 시기가 늦어져 조금은 억세진 쪽파를 가장 큰단(7,900원)으로 한단을 샀습니다. 쪽파김치는 다른 재료가 많이 들어가지 않아 간단합니다. 깨끗이 다듬어 씻어서 멸치액젓 7스푼으로 쪽파밑동 부분위주로 절여줍니다.
절여지는 30분 동안 양념을 만들어 볼게요. 당근 1개와 양파 1개 반 정도를 곱게 채 썰어 주고요. 새우젓 2스푼과 생강 조금, 미리 쑤어놓은 찹쌀풀 1 공기정도를 믹서기에 함께 갈아줍니다. 이어 양조간장 3스푼, 매실액 3스푼, 올리고당 2스푼, 고춧가루 10스푼을 넣어준 다음 쪽파를 절여준 멸치액젓을 살살 따라서 섞어 양념을 골고루 저어주면 빨가니 먹음직스럽겠지요. 절여진 쪽파에 켜켜이 양념을 발라주고 마지막에 통깨를 흩뿌려주니 먹음직스러운 쪽파김치도 완성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더 간단한 깍두기를 담가보겠습니다. 겨우내 김장으로 담은 동치미와 총각김치만 먹었으니 아삭한 무로 담근 깍두기가 먹고 싶을 때가 되었지요.큰 무 2개와 쪽파 한 줌을 준비했어요.무는 씻어서 손자들과 먹을 거라서 좀 작은 크기로 썰어주었고요. 봄무라 그런지 가을무와 달리 아삭하기는 한데 단맛이 없어 설탕 2와 소금 2로 절여주었어요. 양념으로는 쪽파 한주먹을 깍두기 크기로 썰어두고, 양파 1개와 배 1개, 생강 조금은 믹서기에 갈아서 그냥 넣어주면 양념이 걸쭉해질 수 있어 고운체로걸러주었습니다. 밀가루풀 1 공기와 새우젓 2스푼, 멸치액젓 4스푼, 매실액 4스푼, 마늘 한주먹을 믹서기에 갈아서 넣어주고 양념 간을 대충 맞춰주었어요.이제30분 절인 무를 씻지 않고 건져 맵지 않은 고춧가루 10 스푼을 넣어 버무려준 다음 양념을 들이부어 싱거우면 소금을 넣고 단맛은 감미료로 맞춰주면완성입니다.
세 가지의 봄김치를 담가두니 부자가 된듯합니다. 어차피 주부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하니 어디를 가든 어느 상황에서건 재료와 양념들만 있으면 어떻게든 지지고 볶고, 무치고 뚝딱 해내게 됩니다. 물론 내 부엌이 아니니 어설프고 찾아야 하기에 늦어지긴 해도 주인장만 있으면 어려울 것도없겠지요. 그렇게 동서들이 결혼할 때마다 집들이 음식을 해주고,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집에서 돌잔치 음식을 해주었지요. 지금이야 간편한 뷔페음식들이 주부들의 손을 덜어주고 있지만 음식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 울고 웃으며 나누었던 돈독한 가족의 정은 희미해져만 가는 것 같아 아주 쬐끔은 아쉽기도 합니다. 그래도 정짓간에서 시어른들이나 동서들과 함께 했던 그 순간들은 늘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저를 때때로 미소 짓게 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밥상으로 마무리하는 마음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