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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마음을 건드린 더치커피

by 유명

냉장고 문을 열다 더치커피를 발견했다.

앞집 아줌마가 주신 건데 잘 먹다 4개 남은 걸 잊고 있었다.


3년 전에 앞집에 새로운 분들이 이사를 오셨다.

나랑 띠가 같은, 나보다 딱 12살이 더 많은 띠동갑 아줌마와 남편분.

자녀들을 다 출가시키고 두 분만 사셨다.

사교성이 좋고 밝은 분들이셨다.



나는 한 곳에서 21년을 살았다.

새해에는 이웃들과 덕담을 나누었고, 밤늦은 시간 공부하다 귀가하는 학생들에겐 격려와 응원을 나누었다.

날씨 얘기와 아파트 이슈들, 연세 있는 어르신들의 건강이나 그 자녀들의 결혼소식들도 나누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텃밭에서 혹은 시골 어디선가 얻은 호박이나 상추들, 복숭아나 자두, 배추나 무같은 것들도 나누었지만 직접 만든 음식을 나눠본 적은 없었다.

같은 곳에서 20년 넘게 살았지만 이웃들과 음식을 나눠본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앞집에서 떡볶이를 주셨다.

이유는 단순했다.

떡볶이를 했는데 두 분이 드시기에 너무 많이 만들었다는 것.

다음번에는 샌드위치.

이유는 아줌마가 샌드위치를 잘 만드는데, 우리 집 아이들이 한창 먹을 나이라 좋아할 것 같다고.

다음에는 불족발.

아저씨가 일요일마다 요리를 하시는데 이번에도 솜씨를 발휘하셨다는 것.

그 이후로도 김밥, 돼지껍데기 볶음, 부추전, 구운 계란, 생선조림, 채, 안동 찜닭과 쉽게 뚝딱 만들었다며 열무김치, 김장했다고 김장김치, 냉장고에 꽉 찼다고 묵은지. 새로 담갔다고 알타리김치, 너무 많이 담갔다고 부추김치, 를 많이 얻었다며 파김치, 시댁에선 이렇게 김치를 담근다며 제피잎을 넣은 김치, 고향에서 자주 해 먹던 것이라던 생소하지만 맛있는 반찬들까지.



처음에는 불쑥불쑥 무언가를 자주 주셔서 부담이 되었다.

아줌마는 절대로 신경 쓰지 말라며, 내가 주고 싶어 주는 것이니 부담 갖지 말라고 하셨지만 빈접시를 드리는 건 예의가 아니니 냉장고를 뒤져 뭔가를 드리기도 했는데, 갑자기 드릴게 마땅치 않을 때는 괜히 미안했다.

또 어떨 때는 음식들을 들고 "우진이 엄마~커피 한잔 줘요~~"하면서 우리 집으로 쳐들어 오다시피 하실 때도 있었는데 , 갑작스런 방문에 정리되지 않은 집이 여과 없이 드러나 민망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인간이란 적응의 동물인지 싱크대에 설거지거리가 쌓여 있어도, 욕실 앞 빨래 바구니에 빨래거리가 쌓여있고 집이 너저분해도 사람 사는 모습이 다 비슷하지 하면서 웃어넘기게 되었다.

후로는 나눠 주시는 음식들도 기분 좋게 얻어먹고 나도 무언가를 넉넉히 해서 드리기도 했다.(맛은 보장 못하지만)

심지어 우리 집 아이들은 맨날 먹던 엄마가 해주던 음식과는 다른 독특한 특식을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다.



그런데 앞집 아저씨의 사업이 잘 안 되어서 이사 오신 지 3년 만에 다른 곳으로 다시 이사를 가시게 되었다.

이사 전에 냉장고 정리를 하셨다며, 고춧가루 2킬로와 묵은지와 돌복숭아 진액과 직접 만든 대추쨈과 마른미역과 냉동 마늘과 손질해서 소분한 냉동 야채들과 손질해서 바로 먹을 수 있게 냉동한 귀한 생선인 돔과 선물 받은 건데 혼자 먹기 많다며 더치커피까지 주셨던 것이다.

고춧가루 같은 것은 상하는 것도 아니니 그냥 드시라고 해도 "많아요~" 하시며 들이미셨다.


또 나를 집으로 부르시더니 앤틱 테이블과 주방에서 쓸 수 있는 수납 서랍장을 보여 주시며 이사 갈 집에는 들어갈 공간이 없다며 마음에 들면 쓰라고 하셨다.

너무 마음에 들었지만 한 달 후 우리 집도 이사를 앞두고 있었기에 물건 정리가 급했다. 계획에 없던 가구를 집에 들이기가 부담스러워 당근이라도 하시라며 정중히 거절을 했지만 진심으로 이삼일 정도 그 예쁜 가구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자려고 누웠는데도 아른거렸다)


아줌마 집에는 예쁜 그릇들과 고급 찻잔 세트들도 많았다.맘에 드는 걸 고르라고 하셨는데 나는 미안하고 부담스러워 며느리들 주라며 손사래를 쳤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내가 여유가 있을 때는 나누고 베풀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내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지면 그것만큼이나 내 마음도 오그려 붙게 된다.

경제적으로 힘들어 졌는데도 마지막까지 내게 뭔가를 자꾸 주시던 앞집 아줌마.

우리는 둘 다 커피를 좋아했는데 , 우진이 엄마 커피 좋아하잖아~~ 하시며 먹으라고 주셨던 더치커피 때문에 한참이 지난 지금 가난한 내 마음을 주하게 됐다.




드러내놓고 욕심을 부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 걸 남김없이 다~ 주지는 못하는 나.

애초에 뭔가를 바라고 준건 아니지만, 세번을 줘도 한번이 안돌아오면 섭섭해지는 나.

내 가난한 마음이 부끄러워진다.



바라지 않고 나누기.

돌려받을 생각없이 주기.

내가 살지 않던 방식이라도 그것이 좋은 방향이라 생각하면 조금 더 노력해보기.

나도 무언가를 아낌없이 나누고 살아보면, 그래서 나누는 삶이 정말로 좋다고 느껴지면 중력이 무거운 쪽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더 나누는 삶을 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사를 하고 나서도 서너번 전화통화는 했고, 멀지 않은 곳에 사니니 마음만 먹으면 얼굴보는것은 어렵지 않다. 번 드렸던 아롱사태 수육굴이 싱싱한 철에 좋아하시던 굴미역국을 끓여 마음을 나누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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