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동물과 구분하는 이성, 합리적 사고로 우리는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도전정신, 노력 같은 가치를 동력으로 눈부신 기술과 문화적 발전을 이뤘다. 인류가 어떤 다른 종 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는 없다.
자유나 행복, 사랑이나 생명 같은 가치의 문제도 인간은 합리적으로 정의를 내렸다.
더 많이 가질수록 강하고, 강할수록 자유롭고, 자유로울수록 행복하다. 그래서 행복은 그 어떤 가치보다도 물질적이다.
동물이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면,
우리와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고, 그나마 의사소통이 되는 개와 고양이조차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때문에 우리 마루, 양갱이, 젤로는 나로도 만족해 줬다. 마루가 인간이었다면, 이성적인 판단하에 도전정신을 발휘해서 가출했을지도 모른다. 골든레트리버가 제주도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던 때라 외제차가 주차된 전원주택에서 불쌍한 척을 노력을 했다면, 견생역전을 이뤘을지도 모른다. 시골 농협 하나로마트에서 파는 사료 대신에 오가닉 사료를 먹으면서 수영장이 있는 집에서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마루는 도전, 노력, 합리, 이성 같은 것을 몰랐다. 더 가치 있는 사랑, 더 럭셔리한 행복을 따질 줄 몰랐다.
몰라서 몰랐다.
사랑은 사랑이고, 행복은 행복이었다. 거짓말같이 동물들과는 헤어졌다 만날 때마다 점점 더 반가워졌다. 마루는 오가닉 사료대신에 가끔 양갱이가 한눈팔 때 훔쳐먹는 고양이 사료로도 충분히 행복했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양갱이 똥으로도 충분했다. (이상하게 마루는 다른 똥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양갱이 똥은 환장하고 먹었다.-이 사실을 책에다 써서 미안해 마루야)
우리는 넓은 잔디 정원대신에 밭사이로 난 길이나 수확이 끝난 밭에서 뒹굴고 놀았고, 가끔 맘에 드는 무나 나뭇가지를 집으로 가져오는 물욕정도로도 충분히 부자였다. 나는 언제나 미안했지만, 마루는 부족함을 몰랐다. 몰랐기 때문에 몰랐다.
양갱이는 도시에서 태어나 비행기도 타본, 그야말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고양이였지만, 하루아침에 뒤바뀐 제주도에서 자신만의 전원생활 루틴을 방해하지만 않으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젤로는 이성 같은 것 대신에 열정적으로 주인을 지키는 정의의 사도였다.
우리 개와 고양이들은 도전 정신으로 노력하고 있는 나를 항상 말렸다. 행복은 거기에 있지 않다면서, 행복은 마당에, 들판에 있다고, 밥그릇 속에 있다고 알려줬다. 아마 사람말을 할 줄 알았다면, '노력해도 거기서 거기야, 행복은 지금 산책을 나가야 생기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전까지 나는 항상 도전하고 노력했고,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자를 들고 내 인생을 스스로 재단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따져볼 겨를이 없었다. 마치 세일 상품이라니까 필요도 없는 것을 사들이듯이, 돈 대신 인생을 지불하고 말았다.
때로는 인간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 삶의 목적이라는 것은 애초에 죽음일지도 모르고, 애초에 목적 따위 없는 순간의 모음집이 생일지도 모른다.
나는 마루를 데려오는 순간부터 합리적으로 견종을 고르고 골랐는데, 마루는 내가 금발 미녀가 아니고, 햇빛에 그을린 늙은 노처녀라고 비웃거나 깔보지도 않았다. 마루는 매우 동물적으로 사고로 항상 나를 예뻐해 줬다.
“노력해도 거기서 거기야,
지금 행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