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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동안 계속 춤출 수 있는 비법

by 올레비엔


동물과 함께 살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동물의 생김새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고양이나 강아지의 귀가 머리와 연결되는 부분은 사람의 귓바퀴가 시작되듯 살짝 접혀있고, 살짝 찢어져 있다. 찢어졌다기보다는 연결이 안 되어 있다는 말이 맞지만, 처음에 찢어진 줄 알았다. 고양이의 귀와 눈사이, 사람으로 치면 관자놀이는 살짝 탈모가 있다. 처음 발견한 날 우리 양갱이가 피부병이라도 걸려서 털이 빠진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관자놀이 부분은 원래 털이 혜성혜성하다.


강아지의 입은 사람으로 치면 거의 귀까지 찢어진 형태로 매우 크다. 얼굴전체의 거의 3분의 1이 넘을 정도로 큰 입을 가지고 있는데, 형태적으로 매우 균형이 없고, 사람이 그런 게 큰 입을 가졌다면, 기괴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입이 이렇게 볼품없이 작은 종족은 별로 없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유인원 종류도 인간처럼 입이 작지는 않다. 보고 냄새 맡고 먹는 것 중에 어쩌면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해서 입이 그렇게 큰 것은 아닐까.


웃음

인간이었다면 기괴할 정도의 큰 입을 가졌음에도 동물들의 외모는 인간보다 준수하다. 인간이 그렇게 입을 크게 벌리면 예의 없는 사람이 될 텐데, 강아지들이 입을 활짝 열고 헐떡이면서 웃어줄 때면 천사가 따로 없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강아지 말고, 곰, 노루도 비슷한 모양의 입모양을 가졌는데도 웃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없다. 그저 항상 입을 앙다물고 멀뚱히 쳐다볼 뿐이다. 똑똑한 강아지들은 몇천 년간 사람과 살아오면서 사람의 얼굴이 가진 표정을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의 가장 친절한고 강력한 무기인 웃음을 이해하고 따라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친절의 의미를 아는 유일한 생명이 인간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고양이는 미소의 의미를 알지만, 냉소할 뿐이다.


눈동자

지금은 확실히 기억이 안 나지만, 어린 강아지나 고양이의 눈은 대개 짙은 푸른색을 띤다. 아마도 빛에 민감한 아기 때는 자연이 만든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가 성체가 되면서 본연의 색으로 변해가는 듯하다.(아기 때는 푸른 동맥혈이 비쳐서 푸르게 보인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고양이나 강아지는 안구는 사람보다 훨씬 투명하고, 튀어나와 있다. 특히 고양이의 눈은 구슬같이 거의 반구형으로 튀어나와 있는데 이런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자면 우주에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꼬리

꼬리 역시 매우 귀찮으면서도 유용한 신체의 일부인데, 강아지나 고양이는 꼬리 덕분에 혼자서도 술래잡기가 가능하다. 꼬리에는 자연이 선물한 장식을 가지고 있는데 양갱이의 꼬리는 조형적으로 완벽하게 끝에만 몇 줄의 줄무늬가 있었고, 레트리버는 항상 적당한 길이의 갈기털이 있었다. 주기적으로 미용실에서 손질해 주거나 할 필요가 없는 언제나 적당한 길이와 풍성한 털이었다. 그래서인지 동물들은 꼬리를 세우고 자랑을 하거나 언제나 꼬리를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심장다음으로 많이 움직이는 근육이 있다면 꼬리 같다. 잘 때를 빼고는 언제나 살랑거리거나 마구 흔들거나 하고 있었다. 강아지들은 어쩌면 꼬리 덕분에 매 순간 춤을 추고 있는 기분일 것 같았다. 평온할 때는 살짝살짝 뛰면서 부드러운 춤을 추고, 반가운 사람이라도 보면 격렬하게 클럽에라도 온 것처럼 꼬리로 춤을 추는 강아지는 온 생이 축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강아지를 양갱이는 창틀에 앉아 지켜보면서 꼬리를 탁탁 내려치면서, 도대체 진정을 모르는 하룻강아지라면서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고양이의 꼬리는 더 섬세한 감정표현이 가능하다. 거만한 고양이들은 언제나 꼬리를 하늘높이 치켜들고 다니고, 상대를 겁줄 때는 꼬리털을 세워서 거의 두세 배로 부풀린다. 창가에 앉아있을 때는 꼬리를 우아하게 늘어뜨리고 딱딱 박자를 맞추거나 살랑거리면서 여유를 즐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을 때는 선생님이 지시봉을 딱딱 소리 내면서 거슬리게 박자를 맞추듯이 딱딱거리면서 바닥에 내리친다.

요크셔테리어였던 젤로의 꼬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잘려있었다. 그 때문인지 젤로는 우리를 반길 때만 다 엉덩이까지 흔들어가면서 트월킹을 췄다. 꼬리를 자르는 견종은 요크셔테리어, 웰시코기, 슈나우져, 도베르만 등이 있는데, 목양견들이 꼬리를 밟혀서 부상을 입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외형을 유지하기 위해, 체고가 낮거나 꼬리털이 길어서 관리하기 어려운 개들이 주로 자르는 것 같다. 맞다. 꼬리털을 적절하게 미용하거나 똥이 묻는 것이 방지되어 편리하다. 부디 우리 젤로의 꼬리를 자른 사람도 관리하기 좋도록 대머리가 되는 축복을 받기를 바란다.


매일 춤추며 사는 법

같이 살아야만 알 수 있는 강아지나 고양이의 외모가 있다. 쓸모없어 보이는 쌀알 같은 앞니라든가, 고양이의 성격처럼 까칠한 돌기로 가득한 따가운 혓바닥 같은 것은 같이 살아보기 이전에는 몰랐다. 그리고 막 목욕이 끝났으나 아직 꿉꿉한 냄새가 남아있고 살짝 촉촉하면서 보드라운 동물들의 털은 세상에서 가장 보드라운 물질이다.

인간 이미 몇만 년 전에 포기해 버린 아름다움을 동물들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아직도 꼬리가 남아있었더라면 우울한 날 햇빛을 맞으며 산책하는 대신에, 하루종일 즐겁게 꼬리를 흔들며 일상을 보내라는 조언을 들었을지 모른다. 꼬리를 흔드는 것만으로도 춤추는 기분이 들 테니까. 아마 우리에게 아직 온몸 가득 보드라운 털이 있었더라면, 아침마다 무얼 입을까 고민하지 않고, 몸을 한번 후루룩 털고서 출근할지도 모른다. 모두가 날카로워지는 어려운 회의나 협상에서 서로의 털을 어루만지면서 좀 더 보드라운 세상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똑똑한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포기한 쫑긋한 귀와 다정한 꼬리와 보드라운 털이 그리워서 동물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꼬리 없는 사람아
춤은 우리가 출테니,
줄 잡고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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