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
2010년 여름, 병원에서 일주일 만에 가족을 만났다. 항상 공포의 대상이었던 아빠가 힘 없이 병상에 누워 있었다. 원인은 뇌출혈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말하기를, 뇌혈관이 기형적이어서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미리 검사했다면 에방할 수 있었겠지만, 아빠는 평소에 기본적인 건강검진도 받지 않은 듯했다. 이유 없이 매를 맞을 때마다 나는 진심으로 아빠가 없어지기를 바랐다. 그런데 막상 일이 이렇게 되니 마냥 기쁘지 않았다. 엄마가 무너지고 친척들이 우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더 괴로워졌다.
아빠가 쓰러지기 일주일 전, 나는 친구와 도서관에 간다면서 용돈과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그러고는 역에서 휴대폰을 버리고 서울행 전철을 탔다. 나는 고등학교 자퇴를 인정해 줄 때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밖에서 며칠 동안 버틸 만큼 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만한 용돈을 받아본 적도 없다. 대신 인터넷에서 알게 된 인권단체에 무작정 의지할 생각이었다. 모든 것이 위험했지만,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내가 일주일씩이나 가출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변사람들에게 나는 순종적인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나는 학교를 계속 다닐 자신이 없었다.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공부가 싫은 것도 아니었다. 선생님과도 잘 지낸 편이었다. 다만 나는 설명하기 힘든 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제의 원인을 학교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특별한 일 없이 머리가 멍하거나 명치가 답답했다. 종종 호흡도 거칠어 졌다. 학교 복도에서 힘이 풀려서 잠시 주저앉은 적도 있었다. 평소에 잔걱정도 많았다. 작게는 '밤에 화장실 갈 때 누가 깨면 어쩌나'부터 크게는 '이렇게 힘든데 대체 왜 살아야 하나'까지, 온갖 생각이 내 주의력을 갉아먹었다. 나는 넘치는 생각을 감당하지 못했다. 하루 중에서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은 불안감이었고, 불안감이 가라앉으면 무력감, 피로감이 뒤따랐다.
누군가에게 도움받고 싶었지만, 나는 증상을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설프게나마 동네 의사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증상을 이야기하면, 내가 허약하고 소심해서 그렇다는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막상 누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해도 나는 한 발 물러셨을 것이다. 만약 내가 큰 병에 걸린 거라면, 그래서 짐덩이가 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증상을 감추는 게 낫지 않을까. 애초에 상대가 정말 의지할 만할 사사람일까. 훗날 성인이 되고 군병원에서 공황장애로 진단받을 때까지, 나는 내가 그저 허약해서 그런다고 넘겨짚고 문제를 방치했다.
고등학생이 되고 증상은 더 심해졌다.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는 일조차 버거웠다. 일주일, 아니 한 달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드러눕고 싶었다. 방학을 기다릴 수 없었다. 나는 야간자율학습 때문에 혼자 쉬는 시간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허약함이 문제라면, 휴식이 해법이었으니까. 한 번은 명치가 너무 답답해서 조퇴하려 했는데, 담임 선생님이 엄살부리지 말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 때부터 나는 통제할 수 없는 문제에 구속된 것만 같았다. 마음 속에 차분하게 고민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대학이고 뭐고, 나는 당장 학교에서 벗어나야 했다.
다행히 인권단체가 받아 준 덕에 집밖에서 일주일 넘게 버틸 수 있었다. 이대로 그곳 일을 도우면서 눌러앉을 계획까지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단체 대표가 아빠 소식을 전해 줬다. 나는 도망치듯 집에서 나오느라 컴퓨터에 남은 검색 기록을 지우지 못했는데, 친척이 그걸 보고 대표 연락처를 찾았다. 병원으로 가는 전철 속에서 나는 또 한 번 주저 앉을 듯한 무력감을 느꼈다. 참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죄책감까지 더해졌다. 마음은 더 깊이 병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대응법을 몰랐다.
아빠를 병원에 두고 집에 와서, 나는 학교부터 그만뒀다. 엄마도 내 완고한 태도를 봤고, 나도 학교에 계속 다닐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자퇴서를 쓰고 교무실에서 나왔다. 더 이상 괴로운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해방감을 느꼈다. 하지만 해방감은 그 순간 뿐이었다. 이제 마음껏 쉴 수 있게 되었지만, 증상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상황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날 돕는 사람은 없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이제 무력감에 공허감이 더해졌다.
이 때부터 나는 굳이 고통받으며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강박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공책을 펼쳐놓고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했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내 머리 뿐이었다. 물론, 잘 훈련된 철학자도 아닌 사람이 혼자 몇 시간 동안 고민한다고 해서 답을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부족한 지식과 잘못된 방법이 만나면 나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애초에 오랜시간 합리적으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나쁜 생각을 애써 외면하기 위해 강박처럼 고민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마음 속 염증은 계속 방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