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받는 날이 인생 최고 몸무게
오늘은 드로잉 없는 추억소환 에세이
며칠 전
옷을 사는데 이제는 S사이즈를 입어볼 필요가 없게 됐다. 몸이 들어가지 않는다. M사이즈라니. L사이즈 이상인 분들을 기만하는 건 아니고, 평생 입던 사이즈가 바뀐 데서 오는 충격이다. M사이즈로 입어야 했던 때가 20대에 잠깐 있긴 했다.
2004년 스물한 살
영국 자원봉사 활동을 위해 나는 한국을 떠났다. 출국 전 친한 교회 오빠들에게 인사를 했는데, 그중 한 오빠는 자기한테만 따로 인사를 한 줄 알고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내가 영국에 간 4개월 반동안 나를 기다렸다고 한다. 드디어 입국 날 '공항엔 꽃다발이 가득하고 플래카드엔 "OO아 나와 사귀어줄래?"가 적혀있으며 그 오빠는 무릎을 꿇고 내게 고백을 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아니고, 곧바로 내가 중국을 가야 해서 그 오빠는 또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고백할 날만 기다리는(?) 그에 비해, 나는 영국에서 찐 10kg에 더해 중국에서 다시 1,2kg을 찌우고 있었다.
토요일 저녁 영등포역
언제나 그렇듯 붐볐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10kg 이상 살이 쪄서 돌아온 날 보고 당황스럽긴 했단다. 하지만 내 중딩시절부터의 흑역사에 단련된 그의 눈은 청바지를 터져나가게 한 나의 살들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 이후 사랑의 힘인지, 아니면 영국에서 매일 아침 짭조름한 버터를 쳐발쳐발한 대여섯장의 식빵을 이젠 안먹어서인지, 매 점심마다 2,3개씩 먹던 맛없는 샌드위치를 끊어서인지, 간식으로 꼭 챙겨먹던 칩스를 안먹어서인지, 저녁마다 센터에서 제공해주던 헤비한 영국음식을 이제 중단해서인지, 나는 살이 쭉쭉 빠져 마침내 쇄골이 파이는 시점에 그 오빠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아아 옛날이여.
S사이즈가 헐렁하던 이십 대 초반의 나여.
영국에서 돌아왔을 때와 몸무게가 같아지는 요즈음, 구 남친 현 남편과 다시 사랑에 빠지면 그때처럼 살이 쭉쭉 빠질 수 있을까. 지금 살이 쭉쭉 찌고 있는 건 서로 사랑에 빠져야 함을 역설하는 것인가. 따져보니 남편은 20년 전에 비해 20kg 더 쪘다. 20년 전 구 남친, 그가 그립다. 20년 전 구 여친 그녀도 보고 싶구나. 그러나 오늘의 나는 앞으로 남은 날 중 가장 날씬한 모습일지 모른다.... 오늘을 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