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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스락 Mar 06. 2024

개똥이의 보금자리

잊고 지난날들

새벽 기차를 타고 남편에게 향했다. 시간을 쪼개가며 집을 구하고 생활 집기를 마련했다는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길을 나섰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지만 마음은 작은 설렘으로 행복했다.


아이들도 아빠 혼자 지내는 집이 궁금하다며 흔쾌히 동행을 해주었다. 남편에게 미리 연락하지 않고 기차를 탔다. 살짝 걱정되긴 했지만 내려간다고 하면 본인이 올라오는 게 편하다고 내려오지 말라고 할 것 같아 우리는 도둑 기차를 타기로 했다. 아이들은 새벽잠이 깨서 잠깐 재잘거리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나는 오랜만에 기차를 타기도 했고 처음 가는 곳이라 나름대로 긴장하고 있었다.


5시 55분 기차를 타고 7시 34분 신탄진역 도착 2시간이 걸리지 않은 곳 그러나 서울과 사뭇 다른 신탄진역은 고요했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잠을 설친 아이들은 비몽사몽, 일단 택시를 타기 위해 출구로 향했다. 다행히 역내가 복잡하지 않아 쉽게 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남편이 알려준 주소를 향해 택시를 탔고,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아이들은 아빠 집이 여기서 가까우냐, 아빠가 우리 보고 놀라겠다며,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주소지에 도착한 택시는 우리를 내려주고 휭~ 사라져 버렸고 우리는 낯선 동네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비슷한 빌라들이 즐비한 곳에서 남편이 알려준 '베토벤' 빌라를 찾아야 했다. 아이들도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저기 베토벤' 딸이 가리키는 곳에 정말 '베토벤' 빌라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콧웃음친다. 계단을 7개 오르니 출입문 비밀번호 앗! 비밀번호를 모른다. 어쩔 수 없이 남편에게 전화해야 한다.


"아빠" 아빠 뭐 해?"

"아빠 이제 서울 가려고 준비하고 있어"

"어어.... 엄마 아빠 서울 간데" '피식' 아빠와 통화하는 아들은 신이 났다.

"아빠, 그냥 거기 있어 우리가 갈게"

"아빠 준비 다 했어, 이제 올라갈 거야 이따 봐"

"아빠 그러면 지금 나올 거야"

"나오긴 뭘 나와 올라간다니까, 근데 너는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아빠 이따 봐, 안녕"

아들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고 우리는 출입문 앞에서 아빠를 기다리자고 했는데, 골목 안쪽에 주차되어 있는 남편 차가 보였다. "엄마, 그냥 우리 아빠 차에 있자" 딸이 눈을 반짝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유유히 차 버번을 누르고 자연스럽게 차에 탔다. 추운 날씨에 잠깐 고민했지만, 아이들 뜻을 따르기로 했다.


차에 탄 지 5분도 되지 않았는데, 남편이 차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차 문을 열고 소스라치게 놀란 남편.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멍하니 나와 아이들을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ㅋㅋ


"아빠 놀랬지, 우리 새벽 기차 타고 왔어"

"엄마가 아빠 일찍 올라오니까 아빠 출발하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고 해서, 아빠 나 배고파"

아들의 재잘거림에 그제야 상황 판단이 된 남편은 얼른 집에 들어가자고 채근한다.


어리둥절한 남편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일러를 틀어야겠다며 분주하다. 아이들은 쏜살같이 방으로 튀어 들어가고 나는 현관문 바로 앞에 보이는 작은 부엌에서 방으로 시선을 옮긴다. 작은 방에는 침대, 냉장고, 옷장, TV가 주인인 양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그 사이 아이들은 침대 위에서 이불을 끌어안고 있다.

"엄마 괜찮아" 한동안 말이 없는 나를 보고 눈치 빠른 딸이 걱정스레 묻는다.

"응 괜찮아, 아빠 잘 지내고 있네" "이 정도면 궁궐이다." "혼자 살기 딱 좋네"

괜히 너스레를 떨었지만, 마음 한 곳이 움푹 파인 듯 찬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그래도 다행인 건 깔끔하고 꼼꼼한 남편 성격이 집 안 여기저기 그대로 녹여져 있었다. 화장실 발 매트, 싱크대 음식물 거름망, 현관 센서 등까지 세심한 남편의 손길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남편은 마음만큼이나 행동도 분주해졌다. 아이들 아침을 챙기고, 연락도 없이 어떻게 내려올 생각을 했는지 이야기도 들어야 하고, 오늘 뭐 할지, 어딜 구경시켜 줘야 할지, 이래저래 많이 바빠 보였다. 상기된 남편 얼굴에 연신 미소가 번졌다.


잠시 잊고 있었다. 남편은 활동적이지만 깔끔하고 세심한 성격이었다. 나를 만나 살면서 조금은 느슨한 사람이 되었고, 꼬장꼬장 잔소리보다는 내 성격에 맞추려 노력했던 것 같다.


작은 방 남편의 보금자리 여기저기에서 잊고 지낸 남편의 모습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언젠가 남편이 일에 너무 몰입한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 가지에 너무 몰입하면 다른 곳에서 빈틈이 보일 수밖에 없어' '당신은 적당히가 좀 필요한 사람이야.'

그때는 그런 말을 하는 남편이 야속했는데, 고작 두 달 남편이 없는 우리 집은 여기저기 빈틈이 숭숭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며칠 전 치약이 떨어졌고, 세제가 떨어졌고, 화장지가 떨어졌고, 쌀이 떨어졌다. ㅜㅜ


그 사소함을 난 모르고 살았다. 남편이 그 빈틈을 꽉꽉 채워주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앞으로 나는 아이들과 그 사소함을 스스로 채워가며 '적당히'를 아는 사람이 되어 보기로 했다.


개똥이가 있는 보금자리는 따스했다. 그 사람을 닮았다.



#라이트라이팅#라라크루#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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