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아 I-II_욘 포세
이번 글이 이렇게 한도 끝도 없이 늦어질 줄은 생각도 못했다.
멜랑콜리아가 읽는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도 맞지만, 사실 거주하는 지역이 바뀌어서 힘들었던 것도 있다.
너무 개인적인 사정이지만, 현 위치가 캐나다로 바뀌게 되면서 정신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마 원서로 적힌 책을 더 많이 읽지 않을까 싶다.
멜랑콜리아는 한국에서 출국할 때 들고 온 책이다.
노벨상이 곧 발표되려는 시점에 이 책을 샀다.
작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가 갑자기 궁금해졌다는 이유 하나였다.
일단 가벼운 나의 감상평은 '같은 말을 이렇게 다양하고 길게, 지속적으로 적어내다니.. 대단한 작가다..'이다.
책을 읽는데 오래 걸린 이유는 읽는 나에게 정신 착란이 일어나는 기분이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 읽을 때 오랜 시간을 투자하지 못했다.
본격적인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 책은 1, 2로 나뉘어 있다.
1에서는 라스의 내면 속의 이야기를 한다. 시간이 조금 지난 시점에서 작가 비드메가 라스에 대해 판단하는 이야기도 들어가 있다. 2에서는 라스의 누이인 올리네의 시점이 전개된다.
"자네도 말카스텐에 들어갈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없는 건가? 나는 가만히 서서 땅만 내려다보았다. 그냥 들어가면 돼.(p.134)"
이 구절을 앞으로 들고 온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불안과 초조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의 문제를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책은 전반적으로 어떤 한 사람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상황을 펼쳐놓는다. 솔직히 읽는데 괴로웠다. 당연히 나도 불안하고 초조한 상태가 매일같이 반복해 일어난다. 그런데 굳이 남에게까지 나의 불안과 초조를 들키고 싶지 않다. 이 글은 나를 더 깊게 파헤치게 만들고 또 다른 암흑 구덩이에 빠뜨려버렸다.
책을 읽으면서 그 부분에만 몰두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은근히 되게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어 끊을 수 없었다. 나는 우울과 절망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조금의 희망인 빛이 존재하는 형식을 좋아한다. 그것이 현실이든 허구든 상관없이. 그런데 멜랑콜리아가 그랬다.
제목인 melancholia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우울이라는 말로 정의 내리기에는 명확한 무언가가 없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 '멜랑콜리아'를 처음 보고 '이거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림 속 인물의 표정과 구도가 내가 좋아하는 소재였기 때문일까. 온전한 것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로 인해 우울감과 절망, 좌절감, 무력감이 가득 차 있지만, 저 멀리 보이는 알 수 없는 어떤 빛은 오히려 정신을 더 아프게 하면서 판도라 상자의 밑부분에 남았던 희망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이 그림이 나의 마음에 확 들어와 기분 좋음을 선사한다.
멜랑콜리아 그 자체였던 라스 헤르테르비그와 그의 내면을 상세히 표현한 욘 포세.
충격을 주었던 뒤러의 작품처럼 만족함을 느낀 욘 포세의 책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며 집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말했다. 내가 화가가 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도 이전과 다름없이 지낼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돌아올게요.(p.160)"
"나는 이제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어디론가 가야 한다. 이 세상에는 누구든 각자 머물 곳이 있는 법이다. 내게도 머물 곳이 있을 것이다.(p.249)"
이 부분은 나에게 희망처럼 느껴졌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참 멋진 일이다. 알 수 없는 길들을 걸으며 불안에 떤다. 호기롭게 일의 시작점에 발을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두려움이 없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불안이 엄습해 온다. 예상할 수도 없는 시점에 말이다. 여기서 선택지는 다양하다. 다시 돌아가도 되고, 앞으로 나아가봐도 되고, 멈춰서도 된다. 더 많은 방법이 있겠지. 어떤 선택을 할 때도 불안과 초조는 동반된다. 맞다고 확인받고 싶은 마음이 되게 크다. 사실 누구에게 확인을 받고 싶은지는 알 수 없지만, 욕구는 거세져간다. 그 상태에서 나를 진심으로 아끼는, 나도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이 괜찮다고 말해주는 건 공허한 나를 희망으로 차게 만드는 존재자다. 행복할 따름이다.
라스의 이야기가 끝나면서 작가 비드메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직 1이다.
작가 비드메는 노르웨이 교회에 다시 소속되고 싶어 사제를 찾아간다. 그는 라스에 대한 소설을 쓰려한다.
"비드메는 결코 자신감이나 용기로 충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비드메는 노르웨이 교회의 사제들처럼 어떤 특정한 일에 그토록 확신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비드메는 확신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갈팡질팡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빛을 향해 열린 공간을 바라보며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종교라고 생각했다. 종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경이로움과 빛이다. 비드메는 그곳에 있기 싫었다.(p.369)"
이 부분이 짧지만 작가 비드메의 생각을 잘 표현한 말이라 생각한다. 확신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고 빛을 틈틈이 발견할 수 있다는 게 신성하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종교에 대한 생각이라는 점도 인상 깊다. 본편을 다 읽고 그 뒤 작품 해설란에서 작가 자신의 경험과 심경을 표현한 내용으로 보인다고 적혀 있다.
이제 2로 넘어가 보자.
1보다 훨씬 수월하게 읽어갔다.
내가 적을 말이 적기도 하다.
라스의 누이인 올리네는 과거의 기억 속 자신의 동생 라스를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현재와 가까운 기억들을 자꾸 잊으며 더 먼 과거의 기억을 더욱 생생하게 받아들인다. 책 속의 구절 중에 "하지만 나이가 들었을 때의 삶을 샅샅이 다 아는 젊은이들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나는 모른다. 아직 경험해 본 적도 없고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실 2를 읽을 때는 울컥했다. 이유도 정확히 모르겠다. 인물이 나라고 생각했을 때, 그저 갈팡질팡 과거를 바라보는 게 현재의 나로서는 좀 서글펐다.
"난 도끼질을 하고 싶을 때는 도끼질을 하고, 톱질을 하고 싶을 때는 톱질을 해. 난 내가 원하는 걸 할 뿐이야. 라스가 말했다.(p.482)"
많은 고민과 불안을 겪으며 살아가는 게,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한 용기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불안 속에서 계속 글을 써내려 갈 것이다. 용기라는 것을 넓혀가면서.
"작가 비드메는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글을 쓰기 위해선 신의 자비가 필요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