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초의 바람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평일 아침, 좀 더 껴입고 나왔어야 했다고 후회하며 재빨리 지하철역으로 출발한다. 비교적 따뜻한 지하철에서 내리면, 다시 셔틀을 타기 위해 걸어가 대기해야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많은 사람들이 목이 실종된, 한컷 웅크린 자세로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목도리를 자주 매고 있다. 혹자는 목도리 하나 매는 게 그렇게 큰 차이가 나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사실 나도 그랬다. 목에 하나 더 두른다고 크게 달라져? 그냥 내복을 한 겹 더 입고 말지. 라는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목도리의 유무는 정말 크다. 무방비 상태의 목을 보호해 주고, 칼바람에 아프고 시린 얼굴을 집어넣을 수 있는 훌륭한 도피처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내게 목도리를 두르는 것은 옷을 한 겹 더 입는 것에 비해 중요하지도 않고, 별 효능도 없는 행위였다. 하지만 목도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우리를 따땃하게 해 준다.
사실 생활을 하면서 '목도리'같은 존재의 위력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지만, 알고 보면 꽤 많은 것을 막아내고 보호할 수 있는 요인들이다. 경험도 많지 않고, 그렇게까지 버라이어티한 일이 아니지만 나는 살아 오면서 목도리가 불러 온 나비효과를 온전히 느낀 적이 있다.
첫 번째는 대학에 지원할 때였다. '문과면 무조건 상경계열에 진학해야 한다'는 말을 주변에서 수없이 말했던 터라, 고등학교 시절 나의 목표는 언제나 상경계였다. 시간이 흘러 고3이 되고, 가장 높은 대학의 상경계를 쓰기는 어렵겠다는 판단에 다른 학과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느덧 나는 심리학과를 희망하고 있었는데, 이 학과는 소위 말하는 '오타쿠'들이 많은 곳이었다. 3년 내내 심리학과에 오기 위해서 모든 생기부(생활기록부)와 세특(세부능력 특기사항)을 심리학으로 만들어 놓은 아이들과 과연 내가 경쟁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첫 목도리는 심리학 스터디 활동이었다. 1학년 때, 전교생이 거의 필수로 활동하는 스터디에서 문득 재미있어 보였던 심리학 집현에서 1년간 활동했던 것이다. 2년이 흐른 시점, 스터디의 내용이 얼마나 머릿속에 남았겠냐마는 어쨌든 내 생기부에 '심리학'이라는 키워드가 한 줄이라도 들어가 있다는 것에서 위안을 얻고 자신감을 가지며 자소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적같이 붙은 대학교 1차. 2차는 면접이었기에 더욱 떨리는 마음으로 학교로 향했다. 이 당시 면접에서는 '과학적 합의'를 주제로 한 지문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교수님께서 꽤 까다로운 추가 질문을 던지셨다. 잠시 당황했는데, 그 순간 신기하게도 예전에 접했던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책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면접 때에도 나왔던 책인데 이 때는 잘 대답하지 못했던 게 아쉬움으로 남은 책이었다. 어느 순간 술술 이야기하면서 다른 예시들까지 끌어 와 무사히 답변을 마친 나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여러 개의 목도리 덕분이었을까? 나는 기적적으로 (정말 기적이었다) 가장 가고 싶어하던 대학에 붙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과정의 순간순간에 나름 최선을 다했기에 그 목도리들이 추위를 막아줄 수 있었던 듯 싶다.
두 번째는 밴드부 활동이다. 어렸을 때 '쫌쫌따리' 수준으로 여러 악기를 배운 나는, 악기를 배우기는 했지만 막상 자랑할 만한 실력은 아닌 관계로 조용히 혼자서 삭혀두고 있었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고, 공연동아리가 활성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러 밴드부에서 신입부원들을 모집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당시는 코로나 19의 직격타를 맞아 학교도 제대로 못 가던 시절, 공연 동아리의 모집은 상당한 난조를 겪고 있었고 결국 '우선 영입하자'의 모토로 초보도 상관없다는 문구와 함께 여러 번 추가 모집을 신청했다.
여러 번 고민하던 나는 결국, 예전에 제일 기초적인 건 배웠으니까! 라는 생각으로 밴드부에 지원해 합격했다. 생각보다 고등학교 밴드부는 재미있었고, 음악에 열정을 가진 친구들과 합주한다는 건 재밌는 일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여러 다사다난한 과정들이 있었지만 나름 뿌듯하고 기억에 남는 무대를 마치며 밴드에 대한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고등학교 밴드부에서의 활동이 나에게는 또 하나의 목도리가 되어 대학교에서도 밴드에 지원하게끔 했다. 새내기배움터에 가서 본 그 밴드의 실력은 정말 굉장했다.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대학교 밴드부에서는 드럼을 치고 싶었는데, 그 공연을 하는 선배들은 드럼 세션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었다.
지원도 많이 할 것 같은데 그냥 하지 말까? 어차피 다른 활동 하면 되니까 밴드부는 하지 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우선 해본다'의 정신으로 밴드부에 지원했던 일이 떠올라 다시 질러버렸다! 그리고 합격했다.
합주를 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고, 내 부족함을 느낄 때도 많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직접 하나의 곡을 완성할 수 있다는 건 내겐 정말 보람찬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내 '쫌쫌따리' 악기 다루기라는 목도리는 나를 더 도전할 수 있도록, 의구심이라는 칼바람을 조금이나마 빗겨나갈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물론 도전했지만 실패한 것들? 정말 많다... ㅎㅡㅎ 수많은 탈락과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들을 보며 좌절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든 우선 열심히 하고, 우선 해본다는 정신으로 임했을 때 언젠가 내가 짜 놓은 목도리는 이 칼바람으로부터 우리를 막아주고, 움츠렸던 몸을 조금 펴게 하며 앞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