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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py Dec 18. 2023

어바웃 무력감과 강박

어바웃 시리즈

 대학교에 들어와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냐?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시험기간도, 새학기도 아닌 방학 기간을 꼽을 것 같다.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대학생의 방학이 내겐 가장 힘들었다.

 대학생의 방학은 고등학생 때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돌이켜 보면 고등학생 때의 방학도 학기 중보다 더 힘들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는 잠깐이나마 웃고 떠들 친구들이 있었지만, 친구 하나 없는 학원가에 가서 하루종일 수업을 듣고, 문제를 풀고... 밥을 대충 때웠던 적도 많다. 집에서 공부하던 시기도 마찬가지. 소소하게 리프레시하는 시간이 학기 중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무료함에서 오는 무력감이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대학생의 방학은 더욱 그렇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2달 남짓의 시간은 나를 너무 고통스럽게 만든다.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하고, 몸은 힘들어도 그 과정 속에서 보람을 느끼는 이상한 강박?이 있는 나에게 방학 시간은 참 힘들다. 그렇다고 내가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찾아서 하는 성정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그저 이상의 <날개>에서처럼, 고민만 하는 지식인과 같은 형국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나에게 무력감은 참 힘든 녀석이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내 기준은 과도하게 높아져 있다. 우선순위를 결정하지 못한 채 이 일정, 저 일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기 일쑤다. 결국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 학기를 맞이하게 되면 차라리 감사할 정도다.

 방학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이 감정은 무엇인가? 곰곰 생각해보니 무력감인 듯 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간인 걸 알면서도, 무언가를 하고자 하면 여러 가지 자를 가지고 와 '할 수 없는 이유'를 찾고 '이걸 해봤자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 라는 생각으로 넘기기 일쑤다. 

 나의 이 무력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강박에서 찾을 수 있었다.



 최근 전공 시간에 '강박성 성격장애'와 '강박장애'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강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이 강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지, 강박의 범위가 생활의 전반에 해당하는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이걸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고! 이 장애를 공부하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이 있었다.

 우리는 '강박'하면 흔히 완벽주의를 떠올린다. 완벽주의인 사람들을 떠올리면 또 무엇이 떠오르는가? 어떤 일이든 실수 하나 없이 해내는 그야말로 '완벽'한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현실에서의 강박과 완벽주의는 조금 다르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만약 완벽하지 않다면? 할 엄두조차 내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렇기에 현실에서의 강박장애, 강박성 성격장애를 가진 환자들의 경우는 오히려 업무 능력이 저해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숲을 보지 못하고 하나의 나무에만 집착해서 정작 일의 핵심을 보지 못하고, 일을 시작하지 못하니 말이다.


 여느 사회가 다르겠냐마는, 대한민국 사회도 그렇다. 공부를 할 거면 아예 명문대에 들어가야 하고, 직업을 가진다면 아예 전문직이 되어야 하고... 집을 살 것이라면 아예 서울에서 살아야 하고... '모 아니면 도'의 사고방식은 개, 걸, 윷이 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자신이 모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대로 도에 머물러 버리는 역효과를 낳게 된다.

 내가 느꼈던 무력감도 그렇다. 지금 내 실력으로는 모가 될 수 없기에 도에 머무르기를 선택했던 것. 그런데 생각해보면 모는 한 번에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한 칸씩 서서히 이동하다보면 어느덧 모가 되어 있기도 하고, 처음부터 모에 갔다고 할지라도 어느 틈에는 빽도가 나올 수도 있다.

 인생은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가 아니며, 변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그 가운데서 이 주사위가 '모'가 나올지 아닐지 일일이 재고 포기하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 아닐까?



 적절한 정도의 강박 (압박) 은 분명 우리의 성취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잘못된 방향으로 치우쳐 있는 강박은 분명 유익하지 않다. 그러니 이제부터 강박의 방향을 보다 건강하게 바꾸어 보는 것이 어떨까?

 2023년도 얼마 남지 않은 지금, 2024년을 '완벽한'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계획하는 것보다는 하나씩 천천히, 한 말씩 옮겨가며 '모'가 되는 그 날을 위해 소소하고 확실하게 성취를 이루어 내는 것들을 계획해보고 싶다.

 아침에 10시 전에는 일어나기, 하루에 유튜브 1시간 이상 보지 않기, 2주일에 책 한 권씩은 읽기, 토익을 공부해보기, 알바 해보기, 매일 감사일기 쓰기, 나에게 행복을 주었던 것들을 기록하기 등등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강박의 방향을 완벽에서 초점만 조금 바꾸면, 우리의 삶은 조금 더 소소하고 확실하게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종강을 이틀 앞둔 이 시점에서 이번 나의 방학을 위한 나의 자기다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1주일에 하나씩 글을 쓰자는 다짐을 완료한 기특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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