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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때도 다꾸했단다

#다이어리

by 지영 Jan 1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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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 한쪽에 낡은 빨간 다이어리가 있다. 땀땀이 바느질한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다. 꺼내서 조심스럽게 만졌는데도 붉은 가루들이 부스러져서 손에 묻고 바닥에 떨어진다. 다이어리 표면이 삭아버린 것이다.


지하철에 서서 시집을 읽고 있었다. 무심히 페이지를 넘겼는데 온전히 마르지 않은 작은 꽃잎이 내 입김 때문이었을까, 너무 순간이었다. 날아 올라가는 꽃잎을 따라 내 손이 공중에서 당황했다. 앞사람 시선은 나를 따랐을까 꽃잎을 따랐을까, 꽃잎은 그 옆 사람 발 옆에 무심히 떨어졌다. 그 작디작은 것을 집어 다시 책 사이에 꽂는 사이 내 얼굴은 새빨개졌던 기억이 있다. 다이어리 사이사이 밝은 황갈색으로 변해 버린 꽃잎들이 역시나 페이지 곳곳에 있다. 붉거나 노랗던 것이 색도 빠지고 향도 사라진 채 이제는 누런색만 홀로 우뚝 남았는데 잎맥은 그대로다. 나이 들어 맑음이 사라져도 우리 살아온 결 역시 그대로 느껴질 것 같다.


스티커도 사이사이 붙어있고 김광석의 노래 가사도 따로 써서 붙여 놓았다. 책 이야기뿐 아니라 아이들 셋 데리고 청평사에 갔던 사진도 인쇄해서 오려 붙이고, 40대 중반만 해도 저런 열정이 있었나 보다. 남편과 함께 보았던 영화 장면, 뮤지컬 티켓들, 사이트마다의 아이디와 비번이 메모되어 있는 쪽지들을 본다. 덕분에 틀어 노래도 들어보고 영화의 줄거리도 찾아보며 2014년, 그 일 년을 읽었다. 이 이후 10년은 업무용 다이어리뿐인데, 그해 11월부터 나는 그렇게 준비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글로 읽으니 새삼스럽다.


인사발령에 따라 4~5년마다 이사를 해야 한다. 때로는 더 빠르게 움직일 수도 있다. 짐 줄이는 것은 내 삶의 미덕이다. 그러다 보니 살림살이는 늘 간결하다. 아쉬운 부분이라면 추억을 쌓아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지간하면 처분해 버리면서 살았다.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했지만 크게 빛내어 자랑할만한 삶도 아니니 지나간 것들을 남기지 않았다. 저 빨간 다이어리는 자주 열지 않는 서랍 안에서 몇 년 전 발견했다. 버릴까를 몇 번이나 고민했지만, 하나 정도는 가지고 싶어서 그냥 두었다.


2025년 다이어리에 스티커를 붙이니 딸이 말한다 “엄마 다꾸하네” ‘다꾸?’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다이어리 꾸미기’가 인기라고 한다. ‘우리 때도 다꾸를 열심히 했는데’라고 혼잣말을 했지만 요즘 다꾸는 ‘인쇄소 스티 커’를 활용하는 것 같다. 색볼펜이나 색연필로 그림을 그려 넣었고 또는 오려서 붙여가며 꾸몄다면 요즘은 다양한 스티커 등 다꾸템으로 다꾸를 하는가 보다. 자신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표현하고 개성을 뽐내는 것은 즐거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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