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풀만 먹는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흔히 생각하는 뚱보 입맛과는 거리가 있다. 치킨, 피자에 환장하지 않고 고기도 소화 잘 안돼서 많이 못 먹는다. 굳이 따지자면 해산물 파다. 다만, 한 가지는 인정한다. 빵은 못 끊겠다. 그렇지만 채소도 좋아한다. 그건 아마 내가 진정한 '흙'수저라서 그렇지 않을까.
나의 고향은 현재 인구소멸지역으로 이름을 날리는 곳으로,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다. 나는 중학교 1학년때까지 본가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시야에 논과 밭이 들어오지 않는 곳을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교과서에 실린 문학작품에서 회색 도시의 어두움을 이야기할 때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했다.
이곳에서는 일단 푸성귀를 사 먹는 일이 없다. 겨울에도 마당 텃밭에는 (일단 모든 거주형태가 주택이다 보니 마당이 있고 땅이 있으면 무엇이라도 심어서 결실을 보는 것이 시골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이치이다) 시금치가 자라고 있다. 대충 남은 비닐과 철사로 엮은 엉성하고 작은 비닐하우스를 걷어내면 잎이 단단하고 줄기가 제법 질긴, 겨울바람을 이겨낸 초록이들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다.
돈을 들여 사지 않는 식재료에는 상방이 없는 법. 대강 이만 원어치 정도 되려나? 찬바람이 불면 시금치나물을 먹고 싶어 진다며 졸랐던 1시간 전의 내가 원망스러워졌다. 역시 시골에 와서 함부로 뭐가 맛있다거나 먹고 싶다고 하면 안 된다. 그렇지만 폭염경보에 목숨 걸고 수확한 깨로 짜낸 참기름과 너무 억세지 않은 달큼한 시금치가 만나면 꽤 조화롭긴 하다. 국수처럼 후루룩 다 비워내고 서울로 돌아가는 가방에 또 3만 원어치를 채워 갔다.
강호동의 봄동비빔밥 먹방을 아는가? 내가 한창 클 때 그렇게 많이 먹었다. 고기보다 맛있다는 멘트가 무리수가 아닌가 싶지만, 아예 틀린 말도 아닌 것이 시골에서 금방 딴 채소들은 연하며 수분이 많고 공통적으로 단맛이 난다. 봄에는 봄동, 여름에는 조선 배추, 상추, 겨울에는 배추와 무를 재료 삼아 그렇게 양푼비빔밥을 많이 해 먹었다. 비빔밥을 개인 그릇에 덜어주시며 (결코 그릇이 작지 않았다) 매번 엄마는 말했다.
"밥은 별로 없고 다 채소야"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릇이 결코 작지 않았고, 덕분에 탄수화물로 가득한 성장기였지만 내 키는 늘 큰 편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특별실 뒤편으로 불려 간 적이 있었는데 내 머리채에 그녀의 손이 닿지 않아 싱겁게 결투가 끝났다. 초식적인 내 학창생활에 코끼리 같은 덩치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비만인으로서 채소를 좋아하는 반전매력은 30년간 써먹었으니 이제는 사자가 되어 보고 싶다. 어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