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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남긴 축복의 흔적

백반증을 가진 아이

by 도럽맘 Feb 26. 2025

4년 전, 아이가 세 살이 되던 무렵이었다. 햇살이 비치는 아이의 이마 위로 몇 가닥의 흰 머리카락이 보였다. 당시 우리 가족은 중국의 작은 소도시에 살고 있었고, 동네에 하나뿐인 종합병원을 찾아 진찰을 받았다.


진단 결과, 그 흰 머리카락은 백반증의 초기 증상이었다. 하얀 반점은 날이 갈수록 빠르게 아이의 얼굴을 덮기 시작했고, 이마 가르마에서 시작된 백반은 점점 중앙까지 넓게 퍼져 내려왔다. 더 이상 치료를 미룰 수 없었다. 하지만 도시의 유일한 종합병원은 마치 시장통 같았다.


병원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피부과 진료실에는 여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진찰을 받는 형편이었다. 백반증을 치료하려면 꾸준한 레이저 치료가 필요했지만, 그런 어수선한 환경에서 혹시라도 의료 사고가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된 우리 부부는 결국 나와 아이만 당분간 제주도로 가서 치료를 받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시작된 제주 생활. 1년 반 동안 매주 두 차례씩 피부과 치료를 받았고, 다행히도 아이의 백반증은 전신형이 아니라 부분형이라 치료 효과가 좋았다. 눈썹 위까지 번졌던 하얀 반점은 점차 사라지며 원래의 피부색을 되찾아 갔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남았다. 처음 백반증이 시작된 가르마 부분의 동전만 한 크기의 백반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멜라닌 색소가 부족해진 그 부분의 머리카락은 검은색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흰 머리카락으로 남았다. 결국 치료는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고, 아이의 머리는 꼭 겨울왕국의 안나가 가진 흰 머리카락처럼 보이게 되었다.


엘리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왔고 아이는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학교에서든 공원에서든, 아이의 친구들이나 낯선 사람들이 나에게 물었다.


“왜 엘리 머리카락에 흰색 브릿지가 있어요?”


그들에게는 흰 머리카락이 마치 일부러 멋을 낸 것처럼 보였나 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엘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이마에 뽀뽀를 하시려다가 미끄러져 머리카락에 키스를 하신 거야. 그래서 하얗게 변한 거지.”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 말을 곰곰이 곱씹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믿는 눈치였다. 사실 나 역시도 그 말을 마음 깊이 믿기로 했다.


조금 복잡한 가정사 속에서, 아이의 백반증은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제주도에서의 시간 덕분에 나와 친정엄마는 오랜 오해를 풀고 많은 대화를 나누며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중국에서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던 시기에 우리는 제주도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고, 여러 가지 계기로 인해 결국 미국 이민까지 결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였다고 믿었다. 아이의 머리카락에 남은 흔적이 단순한 흰 머리카락이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 주어진 축복의 키스라고.


처음부터 아이가 자신의 흰 머리카락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점점 인지능력이 발달하며 사람들이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그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어떤 친구들은 엘리를 할머니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 말들이 아이의 마음에 적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도서관에서 한 권의 그림책을 발견했다.


“I Absolutely, Positively Love My Spots”

책 표지에는 활짝 웃고 있는 흑인 여자아이가 그려져 있었고, 그녀의 얼굴과 몸에는 하얀 반점이 가득했다. 나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책을 집어 들어 읽어 보니, 이 책은 실제 백반증을 가진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였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고, 미국 전역의 백반증을 가진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책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에게도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엘리는 책을 읽으며 점점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흰 머리카락이 단순한 변색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모두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사실이 엘리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그 후로 어떻게 되었을까?


엘리는 자신의 흰 머리카락을 가장 소중한 신체 일부로 여기게 되었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아끼고 사랑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변화는 놀라웠다.


학교를 마치고 동네 도서관에 갔다. 어린이실 한쪽 테이블에서는 몇 명의 고등학생들이 책을 읽고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궁금증이 많은 나는 다가가 그들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작가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요.”


책을 읽고 작가에게 편지를 보내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들이 읽고 있던 책들을 살펴보는데, 그중에서 “I Absolutely, Positively Love My Spots”와 ”Toto” 책이 눈에 띄었다. 엘리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도 작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요!”


사서에게 물어보니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아이는 작고 귀여운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써 내려갔다. 자신의 소개, 흰 머리카락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작가 덕분에 자신도 자신의 점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작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고등학생들의 편지 사이에서, 엘리의 작은 손글씨를 발견했을 때 어떤 기분이 들까? 자신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지 않을까?


그리고 언젠가, 엘리도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내려가 누군가에게 감동과 용기, 기쁨을 전해 줄 날이 오길 바란다.


아이는 여전히 잠들기 전 거울을 들여다본다. 자신의 흰 머리카락을 아끼고,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한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선물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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