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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도서관 사서와 친해지기

이거 뇌물이 아니올시다

by 도럽맘

도서관에 가기 전, 우리 모녀가 꼭 들르는 단골 가게가 있다. 이름하여 ‘Let Eat Yogurt.’


캘리포니아에서 유제품을 직접 만들어 파는 건 생각보다 까다롭다. 자격증 시험도 치러야 하고, 위생 검사며 각종 허가 절차를 통과해야 한다. 이 가게 사장님도 오픈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들었다. 그만큼 맛은 보장된다. 신선하고 진하고, 한 입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요거트다.


이 날도 아이가 학교에서 나오자마자 차에 올라타며 징징댔다.


“엄마, 배고파… 뭐 먹고 싶어…”

“그래, let eat yogurt 가자.”

“나 오늘 여기가 가고 싶다고 wish 했어!”

“Wish? 하하, 귀엽네.”


사실 이 요거트 가게 사장님은 나랑 동갑내기 친구다. 덕분에 가끔 빵도 서비스로 주시고, 요거트도 듬뿍 담아주신다. 나는 이 집이 미국 전역에 퍼져서 대박났으면 좋겠다. 정말이다.


우리는 평소처럼 딸기 젤리 요거트 하나와 동전 모양 치즈빵을 사이좋게 나눠 먹고, 계산을 마치고 나서려는 순간 문득 도서관 사서 선생님이 떠올랐다. 다시 요거트를 하나 더 사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우리 동네 도서관에는 여러 사서 선생님들이 계시지만, 그중에서도 Ruth 선생님과는 특히 친하다. Ruth 선생님은 한인 2세이신데 한국어를 참 잘하신다. 덕분에 도서관에서는 정기적으로 Korean Story Time도 열린다.

조금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한국어 동화책을 읽어주시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정말 귀여우세요.” 하고 말하면

“아유, 너무 떨려요.” 하며 웃으신다.


그렇게 우리는 1년 가까이 멀찍이서 인사를 나누다, 어느 날 처음으로 긴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었다.


그날은 부에나팍 경찰서에서 도서관에 와서 ‘흡연 예방 캠페인’을 열던 날이었다.


경찰 아저씨들과 아이들이 함께 그림을 색칠하고 교제를 나누는 소란스럽고 따뜻한 날. 커피와 비스킷이 준비된 테이블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엘리는 경찰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며 신나게 색칠을 하고, 나는 Ruth 선생님이 서 계신 커피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수십 번의 “Hi!”와 “Good to see you!” 인사 끝에 처음 나눈 깊은 대화.


알고 보니, 그녀는 목사님의 딸이었고 나 역시 선교사라는 이야기를 꺼내자 우리는 단숨에 가까워졌다.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나는 그녀를 ‘언니’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딸기 젤리 요거트를 들고 도서관에 도착해 두리번거리던 우리는, 다행히 월요일 오후엔 Ruth 선생님이 오피스 테이블에 계신다는 걸 미리 알고 있어서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엘리는 꼭 자기가 산 것처럼 요거트를 내밀며

“For you!”

나는 옆에서 촐싹거리며

“여기 진짜 맛집이에요! 완전 프레쉬해요!” 하고 수다를 떨었다.


Ruth는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는데, 아마 그 미소가 보고 싶어서 사온 게 아닐까 싶다. 정말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요거트 선물 미션을 마친 후, 우리는 도서관 테이블에 앉아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엘리가 “ 엄마, 이거 모르겠어.”라며 수학 문제를 내민다.


고작 1학년 수학인데 왜 이리 어렵냐. 한국식 교육을 받은 나로선 이해가 안 되는 미국식 수학이다.


내가 한참을 헤매자 답답해진 엘리는 벌떡 일어나더니,

그 요거트를 받아든 Ruth 선생님에게 숙제를 들이민다.

…아니, 이러라고 드린 거 아닌데… 괜히 뇌물 같은 느낌이잖아…


하지만 Ruth는 친절하게 숙제를 들여다보며 질문을 설명해주셨고, 엘리는 바로 이해하고 돌아와 숙제를 마저 풀었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머쓱하게 책을 들여다보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Ruth는 퇴근하신 듯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Ruth에게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주 fresh 하고 맛있어요! 그렇게 달지도않고, 감사합니다”


“(나) 맛있다니 다행이에요. 여기 정말 fresh하고 맛있죠“


“네, 너무 fresh 해요. 딜리셔스 !”


도서관에 가는 일이 점점 더 즐거워진다. Ruth 사서 선생님과 조금씩 친해지면서, 짧은 인사 한마디에도 서로 반가운 마음이 전해지고, 그 덕분에 원래도 친정처럼 느껴지던 도서관이 더 정겹고 따뜻하게 다가온다.


부에나팍 도서관에는 Ruth 선생님뿐 아니라 좋은 사서 선생님들이 참 많다. 아이들도 그 따뜻함을 아는지, 거리낌 없이 사서 선생님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참 예쁘다.


다음에 갈 땐 딸기 요거트를 넉넉히 사 가야겠다. Ruth 선생님뿐만 아니라, 이곳을 따뜻하게 지켜주는 다른 사서 선생님들과도 나눌 수 있도록.


도서관은 책을 빌리는 곳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머물다 가는 곳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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