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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장 안에서 행복한가..[쓰는 여자, 작희]

미국 도서관에서 찾은 한국어 신작 책

by 도럽맘

두 달 전, 그러니까 4월 3일 엘리와 함께 오랜만에 라팔마 도서관을 찾았다. 작은 브랜치 도서관이지만 한국어 신작 책이 자주 들어오는, 특히 장편 소설 책들이 많은 고마운 곳이다. 신작은 눈에 잘 띄는 서가 앞에 표지가 잘 보이도록 디스플레이되어 있어 언제나 이곳에 가면 그곳으로 가장 먼저 가게 된다. 그중에 고아보이는 여성의 손이 목련꽃을 들고 있는 표지에 손을 뻗었다. 하필 제목 위로 도서관 스티커가 붙여져 있다. 책을 돌려 책등을 보니 고은규 작가의 장편소설 『쓰는 여자, 작희』라는 제목이다. 끌림과 호기심이 생겨 그날은 이 책 한 권을 빌려와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퇴마사, 귀신, 이런 얘기들이다. 글 쓰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좀 이상하다 싶었다. 몇 장을 더 읽다가 재미가 없어 책을 덮어버렸다. 그리고는 침대 위에, 또는 가방 안에 책을 들고 다니며 틈틈이 책장을 들춰보았지만 이상하게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건지, 어쩐지 책이 잘 안 읽어졌다. 그렇게 어느새 반납해야 하는 날이 다가와서 다시 책을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는다. 침대와 벽 사이도, 그 아래도 손전등을 비춰가며 집 안 구석구석 찾아보았는데도 보이지 않아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도서관에 가서 책을 분실한 얘기를 했더니 책값이 38불이란다. 헉. 사색이 된 내 얼굴을 본 사서는 씩 웃으며 책은 5번 연장 가능하니 계속 연장하면서 5개월 동안 다시 찾아보란다. 어찌나 미안하고 고마운지, 5개월을 연장하며 버티는 건 너무 양심에 어긋나니 몇 주만 더 찾아보고 못 찾으면 그때는 분실 비용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도 ‘목련꽃을 든 고운 손’은 보이지가 않았고, 포기 상태였던 어느 주말 오후, 아이는 날씨가 덥다며 아파트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기를 원했다. 수영을 시키려고 베란다에 있는 수영 가방을 찾아 열었다. “?? 너가 거기서 왜 나와?” 애타게 찾아 헤맸던 책이 그 안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4월 중순에 날씨가 엄청 무더웠던 토요일, 아이가 수영을 할 때 들고 나가서 다시 읽어보겠다며 책을 가지고 나갔다가 그대로 수영 가방에 넣어둔 거다. 아이와 함께 헛웃음을 짓고는 찾은 책을 반납해야 할 다른 책들 위에 올려놨다.


그런데 다시 그 책이 궁금해졌다. 한참 글쓰기에 답답함을 느꼈던 시기라 해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30분만 더 읽어보고 그래도 별로면 그냥 반납하자라는 생각에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30분이 한참 더 흘러 나는 울면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가슴이 울렁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우리 어머니들의 삶이 너무 가엾고 안타까웠다. 억압 속에 자신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인 글쓰기를 놓지 못하는 작희의 불운했던 인생은 피지도 못한 채 꺾여버린 목련꽃 봉오리 같아 보였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자신의 글을 빼앗기고 허무하게 인생을 마무리하게 된 작희, 시간이 흘러 작가 은섬은 작희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그녀의 삶을 추적하면서 작희의 억울함을 풀어주게 되는 이야기 였다.


일제시대, 유일하게 자신을 표출할 수 있는 글쓰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작희와 그녀의 친구들. 무엇을 위해 쓰려는 것도 아니었던, 그저 글에게 무엇을 쓰는 삶이었다. 그냥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행복할 때나, 매일같이 글을 쓰는 그 시대의 여자들을 보았다.


나 또한 내 안에 있는 욕망을 글로 표출하는 방식을 멈추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인정받기 위한 글이 아닌, 나를 표출하기 위한 도구로 글을 쓰고 싶어졌다. 책을 다 읽고 엘리에게도 그 이슈가 많았던 책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내가 읽은 책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 안에서 얻은 깨달음을 언제나 엘리에게 나누고 싶어 한다. 감사하게도 엘리는 이러한 내 이야기를 흥미롭고 재미있게 들어준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글쓰기를 사랑했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엘리는 눈을 반짝이며 들어주었다.


드디어 책을 반납하러 라팔마 도서관에 갔다. 반납하러 가는 길이 이렇게 설레고 기쁠 일인가. 사서를 보며 반갑게 책을 흔들었다. 사서는 처음엔 까먹은 듯 어리둥절하다가, 내가 “I found the book”이라고 말하니 그제서야 함께 웃어준다.


어찌 보면 이 책은 4월의 나보다는 5월의 나에게 꼭 필요했던 책이었던 것 같다. 글쓰기에 흥미를 잃어가고 어려움을 겪던 그 시기, 이 책은 다시금 내 열정을 이끌어주기 위해 가장 적절한 순간에 내게 찾아와준 건 아니였을까?


“글이 너에게 뭘 해줄 거라 바라고 쓴 건 아니지 않니? 그냥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행복할 때나, 매일같이 쓴다고 하지 않았어? 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사는 거지. 작희야, 그렇게 글에 기대어 사는 거다.” – p.249


“그게 끝이야. 그때 느꼈단다. 누구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끝은, 쓰는 사람만이 작가가 된다는 것.” – p.217


“나는 행복했습니다. 내 문장이 있어 좋았습니다. 그러니 나를 가엾게 여기지 말아요. … 당신은 지금, 당신의 문장이 있나요? 그리고 행복한가요?” – p.295

글 쓰는 여자, 작희 덕분에, 나는 잠시 글쓰기에 머뭇거리고 고뇌했던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문장이 아니라, 나를 살게 하는 문장.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이유 없이도 계속 쓰고 싶어지는 마음을 배웠다.


그 마음 하나면, 다시 펜을 들기에 충분하다. 쓰는 나날이 이어지는 한, 나도 분명 살아 있는 사람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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