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가 코브 도서관 Malaga Cove Library
남편과 나는 15년 전, 미국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는 진짜 ‘지지리 궁상’ 커플이었다.
돈이 없어 서울에서는 매일 마시던 커피도 끊고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며 사는 시절이었다. 졸업 후 남편의 고향인 중국에서 자리를 잡으며 드디어 안정감이 있는 삶을 누리게 되었지만 뿌연 미세먼지 속에서 숨을 쉴 때마다 캘리포니아의 맑은 하늘과 끝없는 태평양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괜찮아. 언젠가 경제적으로 더 안정되면 아이와 함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여행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갑작스레 9년 만에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자 상황은 다시 달라졌다. 아이까지 데리고 시작한 두 번째 미국 생활은 유학 시절만큼 힘들었다. 우리 부부는 두 배이상 오른 아파트비부터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다시금 허리띠를 졸라매는 삶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제 좀 편해지나 싶었더니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다.
여름이 되자 지인들은 가족 여행을 떠나지만 우리는 하루 온전히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아이와 공원이나 도서관을 전전하며 여름을 보내며 나도 모르게 불평이 쌓여갔다. ‘이번 생도 여행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끝나는 건가?’
어느 날, 드라이브를 하며 팔로스 버디스 에스테이트(Palos Verdes Estates) 해안 도로를 지날 때 “Malaga Cove Library”라고 적혀 있는 간판을 우연히 보게 된다. 고급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 잡은 도서관이라니,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져 집에 돌아오자마자 검색을 시작했다.
1930년대 스페인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도서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무엇인가 결심하며 아이에게 말한다.
엘리야, 우리 스페인 여행 가볼까?
토요일 아침, 아침밥을 든든히 막고 간단한 짐과 설렘을 챙기고 말라가 코브 도서관으로 향했다. 해안 도로를 따라 달리면서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창문 너머로 얼굴을 스친다. “엄마! 여기 꼭 제주도 올레길 같아!” 엘리가 환호하며 소리친다. 맞다, 길 옆으로 늘어선 나무들, 깨끗한 거리, 고요한 분위기까지. 올레길 같네. 미국에서 제주도를 느낄 줄이야. 왠지 느낌이 좋다.
도서관에 도착하니, 꿈속에 들어온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안개로 덮인 잔디 언덕과 백 년 된 분수대, 그리고 고풍스러운 스페인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된 도서관 건물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하다. 주변을 둘러보며 속으로 감탄한다. ‘아.. 여행이란 꼭 멀리 떠나는 것만은 아니구나.’
마침 그날 도서관에서는 북세일(Book Sale)이 열리고 있어 아이와 반가운 마음에 뛰쳐 들어갔다. 테이블마다 오래된 책들이 가지런히 펼쳐져 있고, 아치형 창문으로 들어오는 은은한 햇살이 책 위로 내려앉아 있다. 클래식 음악이 배경으로 흐르고, 중앙에서 한 백인 아주머니가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다. 순간 나도 아이도 멈칫했다. 방방 뛰던 가슴도 부여잡았다. 여긴 촐싹맞게 다니면 안 되는 그런 품위가 뿜어져 나오는 곳이다.
아이와 함께 천천히 책을 골라 보기 시작한다. 책들은 한 권에 1~3달러, 스티커가 붙은 책은 4권에 1달러였다. “5달러까지만!” 나는 아이에게 엄격하게 예산을 정해 준다. 엘리는 “엄마, 진짜 짠순이야!”라며 놀리지만, 나에겐 나름의 철학이 있다. 책은 가격보다 마음을 담아 신중히 골라야 한다는 신념!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책을 고르며 바구니를 채운다.
계산대에서는 백발의 할머니가 책 값을 받고 있다. 도서관 직원이 아니라 이 지역 주민으로 자원봉사를 하신단다. 할머니도 어린 시절 이곳에서 책을 읽으며 자라지는 않았을까? 혹시 저기 걸려있는 흑백 사진 액자 속의 책을 읽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가 이 할머니가 아닐지 상상해 본다. 할머니는 엘리가 건넨 5달러를 받고, 은색 포일에 싼 작은 초콜릿 두 개를 엘리 손에 올려준다. “땡큐!” 엘리는 감사 인사를 하고 초콜릿을 받아 든다. 우리는 초콜릿을 까서 입에 넣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웃는다.
책을 계산한 뒤 위층 도서관 내부를 둘러본다. 천장에는 백 년 동안 잘 유지된 나무 골격이 보인다. 나무로 만들어진 서가와 시간이 묻어 있는 책들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아이들을 배려한 느낌이 가득한 어린이 코너 구석에는 작은 책장이 보이는데 그 아래에 한국어 어린이 책이 5권 보인다. 내가 어렸을 때 읽을법한 오래된 책인데 누가 기부했을까? 이 책들을 대여하는 주민이 있을까? 궁금한 마음과 반가움에 책장에서 오랜 세월 잠들어 있었을 한 권을 꺼내어 읽어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태평양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여행은 꼭 먼 곳, 거창한 계획을 세워야 하는 건 아니구나. 이렇게 일상 속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여행이 될 수 있다.’
말라가 코브 도서관에서의 하루는 단순한 도서관 방문이 아니라, 작은 스페인 여행과도 같았다. 품격과 여유가 깃든 그곳은 내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남겼다.
이제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여유가 없어서”라는 이유로 일상을 가둬 두지 않겠다고. 여행은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그곳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엘리야! 엄마랑 또 여행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