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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비 Jul 14. 2024

광주의 게이바들(feat, 아찌 관점)

광주, 선유도, 군산의 초여름 열흘 4

부산에서 평소 단골로 드나들던 게이바 사장님에게 물었다.

"내 나이에 광주에 가면 어떤 게이바를 가야 하나요."

사장님은 네댓 군데를 추천해 주셨는데, 광주에 도착한 날 찾은 곳은 <G 바(아는 분은 다 알 테고, 모르는 분은 시티에서 검색을... 가게명들은 앞글자 이니셜로 표기하겠습니다)>였다. 먼저 온 손님들이 바에 앉아있었고, 귀여운 모자를 쓴 남자가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우리는 맥주와 기본 안주를 시켰는데, 안주로 나온 과일들이 다채로워 일단 합격점! 광주는 술집 안주도 다르다.

종업원에게 광주의 게이바 근황을 물어보는 등, 기초 정보를 모은 다음,

"부산의 OO사장님 소개로 왔어요."

"아, 그분 친구는 다른 분인데..."

곧 OO사장님 지인인 다른 종업원이 와서 본격적인 수다가 시작됐다.

중년 게이바 사장들 사이엔 네트워크가 있어서 전국 어딜 가도, '혹시 거기 거기 사장님 아세요?' 물어보면 대체로 '아, 그분...' 하고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것 같다. 가게를 쉬는 날에는 서로의 지역에 놀러 가서 술도 팔아주고 정보도 교환하는 모양인데, 게이바가 쉬는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교류가 집중된다고.

"쉬는 날이지만, 우리가 놀러 가면 가게 문을 열어주죠. 그럼 우리끼리 신나게 놀고, 술도 좀 팔아주고, 하는 거죠."

게이바를 독점해서 놀 수 있다니... 부러웠다.


중년 이상의 나이대 게이가 갈 수 있는 게이바는 가볍게 한잔 하는 원샷바와 단란주점 형태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친구가 "노래하고 싶다"라고 청하지 않는 한, 원샷바에서 칵테일이나 와인 한잔 하는 걸 즐긴다. 단란주점에 가도 노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야 마이크 잡으면 놓기 싫어하는 성격이었고, 오스씨조차 70년대에 유행했던 노래들이나, 일본 엔카도 구성지게 부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성대가 늙어가면서, 또 아이돌 음악이 흥하면서 노래방에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점점 줄어갔다.

그러다 어느 나이를 기점으로 더 이상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게 부담스러워졌다. 일단 키가 너무 낮아져서 내가 신청한 노래가 나오면 키부터 낮춰야 한다. 평소 연습을 단단히 했으면 적당한 키를 외웠다가 능숙하게 높낮이를 맞출 텐데, 술 먹고 대책 없이 부를 때가 많다 보니 키 조정하느라 앞부분은 다 날리고, 고음에선 삑사리 투성이가 되곤 일쑤다. 근사한 남자란 이미지를 팔고 싶은데, 헛웃음 유발하는 사내 장기자랑 애송이로 전락하는 일이 반복되자, 게이바 무대 은퇴를 선언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나도 때마침 손님이 전혀 없으면 기꺼이 무대 앞으로 나가 마이크를 잡고, 18번 레퍼토리를 신나게 풀어낸다. 가게 사장에겐 미안하지만, 원이 풀리도록 노래하고 싶을 땐 손님이 안 오길 바랄 때도 있다.


<G 바>에서의 시간이 끝나가고, 사장에게 조용히 마실 수 있는 가게를 추천해 달라 했다.

"마침, 우리 가게에서 일하던 형이 어제 가게를 오픈했는데..."

직접 그 가게까지 에스코트를 해주겠다 해서 따라나섰다.

'요즘은 이런 거 안 해주는데...'

오스씨가 작게 속삭였다.

자기 가게 손님을 다른 집에 소개하는 것, 또는 직접 그 집에 데려다주는 것을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최근에 다른 지방에 놀러 갔을 때, 몇 번 정보를 물어봐도 네이버지도에 표시해 줄 뿐, 직접 데려다주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는 쉽게 해 주던 일이었다. 게이바들이 다들 골목골목 구석진 곳에 있기도 해서 초행인 외지인은 헤매기 십상이다. 손님을 직접 배달해 주면서 게이바 사장들끼리 생색내기도 좋았을 것이다. 그냥 같은 가게에서 일하던 친분 때문일까, 아니면 광주는 아직 그런 정이 남아있어서일까?


<K 바>는 아직 페인트 냄새도 채 가시지 않은 신상 원샷바다. 웃는 얼굴이 인상적인 사장은 덩치가 무척 작아 보였다. 가게 이름은 그의 별명에서 따온 거라고. 사장은 기본안주를 이것저것 내놓으면서 '개업떡'이 없음을 변명했다.

"아, 글쎄, 떡을 맞췄는데 이걸 냉장고에 넣는 걸 깜빡해서 다 쉬어버리고..."

"아이고, 그걸 어째..."

안타까움의 추임새를 넣어가며 맞장구 쳐주었지만, 이미 전작으로 올챙이 배가 되어버린 나와 떡 싫어하는 오스씨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K 바> 손님들은 대체로 사장의 새 가게를 축하해 주러 온 지인들이어서, 손님 대 손님의 대화를 나누기엔 다들 바빠 보였다. 배도 불러오고 해서 시킨 맥주를 다 먹지도 못하고 아쉬운 인사를 하고 나와야 했다.

"사장님, 진짜 작고 말라서 귀여워 보인다."

"뭐? 볼살이 빵빵해서 통통해 보여 귀엽던데."

오스씨와 나는 좋아하는 스타일이 거의 정반대다. 같은 사람을 봐도 감상이 이렇게 다르다.

게이바 거리에서 숙소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갈 때는 택시를 탔지만, 올 때는 배도 꺼트릴 겸 천천히 걸어서 돌아왔다. 비가 오지 않아 어찌나 다행이었던지.

돌아오는 길에 만난 이상한 조형물.

둘째 날에도 밤은 돌아왔고, 우리는 다시 게이바 거리로 향했다.

"요즘은 금요일이 주말 같지도 않아. 손님이 별로 없어요. 토요일만 장사되고... 부산은 어때요?"

<G 바> 사장님 말에 부산도 딱 그 짝이라면서, 중년 게이바 경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걱정을 나눴다. 우리 단골 가게 사장님도 항상 투덜거리는 말.

"불금이란 말 이젠 없어졌나 봐."

그래도 토요일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G 바> 사장의 호언장담을 믿고 간 곳은 <S 바>이었다. 이곳은 통통 이상의 체형들이 주로 오는 곳이다.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오스씨를 위한 특별서비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노랫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G 바> 사장님의 말마따나 토요일이어서인지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그득그득했다. 무대에서는 두 명 이상이 서서 노래를 부르며 몸을 흔들고 있었다. 노래를 기가 막히게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장이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성황이네요."

내 목소리에서 무언가를 오해한 걸까? 주인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평소에 오는 손님들이 아니라고 극구 변명을 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에요."

테이블을 차지한 손님 전체가 무슨 단체모임이라고 했다. 이런 구성인 줄 알았으면 단체 예약을 안 받을 거라는 후회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분명 통통 이상이 오는 가게로 알려졌는데, 단체 손님의 태반은 어쩜 저렇게 마를 수 있지 싶을 만큼 마른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통통 게이바의 일반적인 흥망성쇠를 알아보자.

게이바들은 크게 나이대로 손님이 나뉜다. 젊은애들(20-30대)이 가는 곳과 중년(40-50대)이 가는 곳과 노년(60대 이상)이 가는 곳. 칼 같은 구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사장님의 나이대에 따라 그런 식으로 구분 지어 영업하는데, 유일하게 체형이 기준인 가게가 베어바 또는 뚱바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곳은 뚱뚱하거나 통통한 사람을 좋아하는 게이들이 주로 모인다. 이들이 대체로 자신들과 비슷한 체형을 좋아한다. 이성애자들은 대체로 몸이 뚱뚱하면 상대는 마른 사람이길 바라는데, 게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런 식이어서 비슷한 체형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놀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문제는 이런 체형을 좋아하는 마른 몸의 게이들도 꽤 있고, 역시 마른 이를 좋아하는 통통도 있다는 거.

그래서 이런 패턴이 생겨버린다.

어느 가게에 '예쁜 뚱(베어)이 많다'라고 소문나면, 그 가게는 뚱(베어)들로 넘쳐나고, 그들을 '원하는' 마른 이도 덩달아 늘어난다. 보통은 7:3 정도의 비율로 유지되는데, 수요공급이 어긋나는 날이 있기 마련. 마른 이가 테이블을 많이 차지하는 날이면, 뚱들은 할 수 없이 다른 가게로 가고,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 '그 가게엔 이제 예쁜 뚱이 없대'라는 소문이 나서 뚱도, 마른 이도, 아무도 안 오는 식이다. 물론 개업하자마자 발생하는 일은 아니고, 대략 3-4년 사이에 서서히 진행된다.

실제로 오랜 단골들을 기반으로 십 년, 이십 년 이상 영업하는 가게들이 넘쳐나는 게이바 세계에서 베어바(뚱바)만큼은 오랫동안 장사하는 가게가 없다.

<S 바> 사장님이, "우리 가게 손님"이 아니라고 부정하며 저들을 흘겨보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사장님의 면을 세워줄 만한 덩치 좋은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하지만 무대는 이제 단체 손님들이 한꺼번에 대거 나와서 탬버린까지 흔들며 흥을 뿜어내고 있었다.

"요즘은 어디에서도 저렇게 안 노는데..."

사장은 그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사실 <너의 목소리를 보여줘>의 애청자이기 때문에, 마치 음치대결을 하는 듯한 그들의 퍼포먼스가 싫지 않았다. 다만, 밤은 계속 깊어가고 한 군데 정도 더 가보고 싶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다음 향한 곳은 신생 가게라는, 역시 단란주점 형태인 <B 바>였다. 가게는 기둥을 중심으로 두 개의 구역으로 확실하게 구분되는 기묘한 형태였는데, 기둥 안 쪽엔 젊은이들이, 바깥쪽엔 중년들이 앉아있었다. 우린 자리 안내를 받지도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바깥에 앉았다. 성대가 싱싱한 젊은이들이어선지 고음의 곡을 시원하게 뽑는 친구들이 많았다. 엠씨더맥스의 '어디에도'가 완벽하게 구현되었을 때는 가게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보낼 정도였다. 뿔테 안경 낀 종업원(너드 같은 얼굴에 성난 몸)이 취향저격이라 오래 앉아있고 싶었지만, 어제와 마찬가지로 올챙이배 상태라 결국 맥주를 또 남기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 하루에 두 군데를 가는 건 위장에 못할 짓이다 싶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지만, 오늘도 소화를 시키기 위해 숙소까지 걸어갔다.

"어땠어? 오늘?"

오스씨에게 물었더니, <S 바>에서 나중에 들어온 뚱뚱한 애가 귀여웠다고 한다. 그거 입고 있던 애 맞지? 그래, 걔 귀엽더라. 난 누가 눈에 들어오냐 묻길래, "난 자기밖에 없어, 알잖아..." 하고 윙크를 보내... 는 대신 가게에 있던 멋진 남자들에 대해 신나게 떠들어댔다.

뭐, 우린 이렇게 논다. 결국 게이에겐, 남자 얘기만큼 재미있는 게 없다.


참, 내가 기대했던 전라도 남자(얼굴에 각이 좀 있고, 눈은 부리부리하지만 눈빛은 그윽한. 약간 하이톤의 나긋한 사투리)는 딱 한 명 봤다. 짧은 머리의 스포츠맨 스타일로, 진짜 멋지게 생겼다.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아 남자의 목소리를 못 들은 것이 안타까웠다. 심지어 시종일관 나와 눈까지 마주쳤는데...

"계속 내 쪽을 쳐다보더라고. 분명 나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는데, 안 됐다, 그 남자. 내가 임자 있는 사람인 걸 몰랐겠지?"

"네 머리 위로 노래가사 나오는 액정이 있었잖아. 그거 본 거 아닐까?"

오스씨, 이 양반, 분명 T다!

아무튼 그 남자 빼고는 내가 꿈꾸던 전라도 얼굴은 없었다. 다들 뭐랄까, 부산에서 보던 얼굴과 비슷했다.

하긴, 예전에나 먹는 게 지역마다 다르고, 혈통도 달랐겠지만, 요즘은 다들 비슷한 거 먹고, 인적 교류도 활발하니까 피도 적당히 섞여서 비슷비슷 해졌겠지. 요즘 전라도 사람들은 심지어 사투리도 잘 안 쓴다.

아쉽다, 내 사랑 전라도 남자는 이제 환상의 영역으로 사라진 걸까...

둘째 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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