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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 Mar 04. 2023

   거울 앞에서  


  "이 사람아, 뭘 그렇게 히죽거려 가며 거울을 드려다 보고 있어? 아무리 드려다 봐야 당신은 머지않아 이제 할머니 될 사람이야."


"당신은 꼭 그렇게 마누라 기를 죽여야만 행복하우?"


일요일 아침, 소파에 늘 척하게 앉아서 커피를 기다리고 있던 남편이 공연히 아침부터 내 속을 긁는다.


우리 집 거실에는 술을 진열해 놓고 간단히 칵테일 도 만들 수 있는 바가 있다. 먼저 집주인의 취향이었는지 온통 거울로 만들어져서 그 앞에 서면 사실 좀 어지럽다. 그러나 나는 아침마다 부엌 대신 그곳에서 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걸 즐긴다. 솔직히 고백하면, 언제나, 어떤 표정의 얼굴이던 팽팽하고 갸름하게 비춰주는 그곳 거울이 마음에 쏙 들어서다. 아침마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 푸석푸석한 얼굴을 요리조리 거울에 비춰보면 언제나 말알갛게 생기 있는 모습이니 빙긋이 착각에 빠질 만하다. 아마 그러한 내 모습이 남편 눈에 우스워 보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착각도 잠시 후면 여지없이 무너질 거라는 것도 난 잘 안다. 커피에 간단한 아침을 먹고 화장실에라도 앉아있을라 치면 마주 보이는 거울 속에 부스스하게 늙어가는 어떤 여자가 멀뚱멀뚱 쳐다볼 테니 말이다.



요즈음 세상에는 집집마다 아니, 가는 곳마다 그리고 소지품마다 거울이 없는 데가 거의 없다. 하다못해 길을 가다 옷매무새라도 보고 싶으면 쇼윈도를 슬쩍 보아도 훌륭한 거울 노릇을 해 주고, 점잖은 자리에서 식사라도 하고 거울을 꺼내 보기가 좀 민망스러우면 전화기를 꺼내 만지작거리며 슬쩍 비쳐 봐도 어느 구석이든 거울 대신 쓸모가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 많은 거울들이 저마다 표정이 있다는 거다. 어떤 거울은 언제 보아도 팽팽하고 뽀얗게 비춰 주고 또 어떤 거울은 축 쳐진 것이 며칠 밤을 새운 사람처럼 눈언저리가 검으스레 꺼져 보이기도 한다. 또 어떤 거울은 둥글넓적 펑퍼짐하게 퍼져 보여 두 번 다시 그 앞에 서고 싶지가 않다. 백화점의 거울들이 실제 보다 더 날씬해 보이고 싱싱하게 비춰주는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이다.  


오늘 아침 따라 입술이 심술궂게 축 늘어져 보이는 남편이 유난스레 밉살스럽다. 그 사람 눈에 내가 할머니로 보인다는 사실이 영 불편하기만 하다. 눈치 없이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는 그가 미워 커피를 건네면서 눈을 하얗게 흘겨본다. 얼마 전, 내 나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딸 결혼식 때사진을 같이 보면서 행여나 그의 눈에는 달리 보일까 싶어

“이 사진사 정말 엉터리이네 난 또 왜 이렇게 늙어 보여?”


슬쩍 떠보는 나에게


"허, 허~, 사진은 거짓말 안 해 이 사람아. 왜 죄 없는 사진 탓을 해. 이제 늙을 때도 됐지."


그때 들었던 말까지 갑자기 되살아나


 "물~"


하는 남편에게


"당신은 손 없수?"


톡 쏘고는 마당으로 나왔다. 요즈음 걸핏하면 할머니 타령을 하는 남편 때문에 정말 내가 쭈그렁 할머니가 된 것은 아닐까 싶어 영 우울하다.



직업상 날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는 유행가 가사처럼 이상하게 앞에만 서면 내가 작아지는 느낌에 자신이 보잘것없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쩐지 내가 특별한 사람인 것 같고, 아주 귀한 존재인 듯 느끼게 만들어 주는 사람들도 역시 있다. 꼭 칭찬을 남발하고 혀끝에 발린 말을 해서가 아니다. 상대방이 가진 단점은 눈 감고 장점만 찾아서 사분사분 지나가듯 말해 주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자신감이 생기고 그 사람이 칭찬해 주었던 그대로 보이고 싶고 그대로 행동하고 싶어 진다. 그리고 그 사람의 장점이 무엇인지 찾아서 나 역시 소곤소곤 알려주게 된다. 그러나 반면, 말이 날카롭고, 비판적이며 숨어있는 내 치부를 꺼내서 흔들 것 같은, 아니 사실 흔들어 대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리고 여차하면 도망치고 싶어지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일까, 슬그머니 자신이 없어진다. 내 앞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종류에 거울 역할을 하고 있을지 가만히 생각을 해 본다. 내 주위에 내 모습을 아름답게 일깨워주는 사람들이 많다면 나는 우리 집 거실 바에 있는 거울 같은 사람일 거고, 내 주위가 온통 나를 피곤하고 칙칙하게 만드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면 나는 분명 우리 집 화장실에 거울 같은 여자이리라.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일이 떠오른다. 어느 점잖은 집에 저녁 초대를 받아 갈 일이 있었다. 꾸미고 차려입는 것을 유별나게 싫어하는 남편과 동반나들이를 하려면 항상 옷 입는 것 때문에 실랑이를 하느라 나갈 때쯤이면 우리는 벌써 지쳐있다.


"이 사람아, 옷이란 편하고 깨끗하게만 입으면 되는 거야. 내가 지금 선 보러 가나?"


하며 결국 고집대로 자신이 편하다고 생각되는 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점퍼를 걸치며 나서는 남편한테 질려서 볼이 잔뜩 부은 나는 가는 내내 자동차 안에서 쫑알댔다.


"당신이 이팔청춘이야? 머리는 허였고 얼굴은 쪼글쪼글 다리미로 다리게 생겼는데 저녁모임에 무슨 청바지에 티셔츠야. 나이 먹어서 옷을 구별해서 입을 줄 모르면 얼마나 초라하고 구질구질한지 알아요? 그리고 옷을 제대로 갖추어 입는 것은 초대해 주는 사람에 대한 예의이라고요, 예의“


요즈음 남편이 유별나게 해 대는 할머니 타령이 바로 이 말에 대한 반격인 모양이다.  



"여보, 요즈음 잠이 안 온다더니 어젯밤에는 잠을 푹 잔 모양이네요. 오늘따라 당신 얼굴이 반질반질하고 피부가 윤이 나네. 그래서 그런가 하얀 머리칼도 멋져 보이고, 내 남편 웬일이야?"


거실 바에 붙어있는 내가 좋아하는 그 거울 앞에서 열심히 연습을 해 본다. 또 누가 아나,

 

"이 사람아, 거울은 왜 보나, 당신은 언제 보아도 39살 같은데. 허 허."


라는 대답이 날아올지.  바 거울 속에서 39살 싱그러운 여인이 하얀 목단 꽃 같이 웃고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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