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지를 옮긴 지 3개월이 지났다. 이젠 어느 정도 업무파악도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근무하는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근무하는 동주민센터에는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요가, 통기타, 캘리그래피, 노래교실 등이 운영되고 있고, 작은 도서관에서는 그림 그리기와 뜨개질도 진행된다. 그중에서도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인문해라는 것이 있다. 내 사무실 바로 옆 프로그램실에서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에 2번 진행된다. 무엇을 하는 곳인가 궁금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글을 모르는 어르신들을 위한 한글교실로, 연세가 7, 80대 어르신들을 위한 한글 공부방이었다. 대부분 해방 전후로 태어나 격동의 시대를 살아오신 우리들의 어머니와 아버지시다. 대부분이 할머니들이시고 할아버지는 한분만이 계신다. 20여분이 일주일에 2번씩 노세한 몸을 이끌고, 꾸준히 배우시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강사님도 나이가 지긋하신 60대의 여자 강사님이시다. 우리 사무실 옆에서 진행되다 보니 더 관심이 갔다.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일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에어컨을 켜 놓는 일이나, 프로그램실을 정리해드리는 것을 도와 드리게 되었다. 사소한 일이지만 어르신들은 매우 감사하다는 표현을 잊지 않으신다.
모든 프로그램이 무료로 진행되니 너무 좋았다. 그만큼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부를 하시는 할머니들의 준비물은 공책과 연필, 책, 구구단이 적혀 있는 책받침이 전부였다. 노트에 반듯반듯하게 꾹꾹 눌러쓴 글자 한 자 한 자가 정성을 다해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구구단도 이제 다 배우셨다고 자랑하신다. 너무나 본인 스스로에게 자랑스럽다고 말하며,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하시는 모습에서 왠지 마음이 아팠다. 한평생을 제대로 한글과 구구단을 모르는 불편한 몸으로 한평생을 살아오신 기막힌 인생이 너무나 안타깝기만 했다. 그분들이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시대의 어머니들이시다. 나의 어머니도 1938년생 이셨으니 이 분들과 같은 나 이때셨다. 일제감점기에 태어나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을 겪으며 어수선한 시대에 제대로 학교를 다닐 수도 없었던 시대였다. 먹고사는 것이 인생최대의 목표였기에,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사치라고 늦껴지는 시대였다. 또한 남자는 초등학교라도 가르쳤지만, 여자들은 가르치지 않으려 했던 시대적의 분위기도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다행히 국민학교 4학년까지 다니시고, 졸업은 못했지만 한글과 구구단은 배우셔서 그나마 다행이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한평생 불편함 없이 살으셨다고 하셨다. 어르신들을 옆에서 보니 이제는 하늘의 별이 되신 어머니가 더 그리워졌다.
이 어르신들도 그 험한 세상을 살아오시면서 얼마나 불편한 세상을 사셨을까. 눈을 뜨고 한평생 살아왔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한평생의 한 맺힌 세월이었으리라.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어머니로 훌륭하게 살아오신 그분들의 세월에 아낌없는 박수와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래도 세상이 좋아져 늦은 나이일지라도 죽기 전에 평생의 한을 풀게 된 것에 감사하다고 하신다. 우리 대한민국의 굴곡진 역사를 살아오시고, 이 만큼 잘 사는 나라로 만들어 주신 어르신들에게, 국가나 우리 사회가 많은 지원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도와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르신들은 나의 아주 작은 선행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꼭 표현하신다. 사탕 서너 개를 건네주시거나 고맙다는 말을 하시는 모습에서 진심이 느껴지곤 한다. 나도 어르신들을 통해 하늘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 주변이 웃어야 한다. 주변이 웃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잘해야 한다. 내가 먼저 인사하고, 내가 먼저 솔선수범하며, 내가 도울 일이 있는지 먼저 물어보는 모습에서, 인생은 살맛 나는 세상이 된다는 법을 이젠 알겠다. 그래서 동주민센터에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이나 주민센터를 찾아오는 주민들에게 먼저 인사를 하곤 한다. 내가 웃으며 인사를 하면 상대방도 웃으며 인사한다. 마치 거울을 보며 내가 웃으면 상대방이 웃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나의 표정과 행동이 나의 향기라고 생각한다. 나의 마지막 근무지가 이곳이 될 것이다. 내가 떠난 이 자리에 나와 함께 근무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향기를 남기고 싶다. 꽃에만 향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 꽃의 향기는 열흘을 넘길 수 없지만, 사람의 향기는 그 사람이 떠난 후에도 향기는 남는 법이다. 나의 작은 친절과 인사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진한 향기로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오늘을 만들어야겠다. 어르신들을 볼 때마다 내가 인사를 하면 더 반갑게 맞아 주시는 모습에 너무 행복하다. 내가 주변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사는 오늘이 너무 좋다. 오늘이 즐거우면 내일은 더 행복하리라. 오늘이 좋다. 내일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