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꿈의 숲 08화

8화 스님의 방

영적 통로!

by 우산을 쓴 소녀
글, 그림: 우산을 쓴 소녀

8. 스님의 방

- 영적 통로! -

등장인물: 루미나, 샘, 카일라, 에드


홀로 남겨진 루미나는 옷방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헤치고, 바닥의 상자들과 구석진 수납함까지 꼼꼼히 살폈다.


“여기 무언가 있어. 분명히 있는데…”

그렇게 몇 분 동안 집 안을 샅샅이 뒤지던 그녀는 벽 쪽으로 길게 파인 홈 하나를 발견했다.


루미나는 그곳을 몇 번 두드려보더니, 틈이 있는 부분의 벽지를 천천히 뜯어내기 시작했다.

벽지 틈을 따라 모두 뜯어내자, 그제야 얇은 종이 뒤로 낡은 창호지가 나타났다.


“그렇구나. 옛 마을이 그곳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어…”


그녀는 창호지를 덧댄 창을 옆으로 밀었다. 방 안에는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의 커다란 불상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주변은 은은한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경복궁에서나 볼 법한 웅장한 나무기둥과 왕실 문양들이 고풍스럽게 공간을 수놓고 있었다.


“와, 여긴 꼭 왕실 안에 있는 절 같아…”


루미나는 주인 없는 절방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그때였다. 도망칠 틈도 없이 한 여승과 눈이 딱 마주쳤다.

젊고 인자해 보이는 그 여승은 루미나를 보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루미나는 여승의 행동이 신기한 듯, 창가 쪽으로 다가가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았다. 그녀는 곧 스님이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걸 확신했다.


여승이 불상 앞에 조용히 절을 올리고, 천천히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본 뒤에야 루미나는 조심스레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샘이 온다고 했는데, 화장실이 있는 방까지 다녀오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거야. 혼자서라도 얼른 보고 와야겠어.”

그녀는 담을 넘듯 창을 지나 조심스럽게 스님의 방으로 들어갔다. 주인이 있는 방에 허락 없이 들어온 것이 마음에 걸린 그녀는, 부처님을 향해 고개를 숙인 뒤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루미나는 순간,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본 뒤 마당으로 곧장 보이는 일주문을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그녀는 에드가 싸준 도시락을 앞마당에 질질 흘리며 뛰었다.


“휴~ 안 들켰어! 와! ”

담벼락에 기대 있던 루미나는 여승이 자신을 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스님은 이미 앞마당을 가로지르는 루미나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사람들이 자신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믿은 채, 숲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달려 나갔다.

그렇게 언덕길을 내려가던 루미나는, 자신들이 처음 들어왔던 집과 똑 닮은 하얀 집을 발견했다.


“엇? 하얀 집이 또 있어?…”

그녀는 모든 것이 어리둥절했고, 에드 부부가 손을 흔들며 맞이할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하얀 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금 전까지 자신이 머물렀던 1층 거실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묘하게 낯설었고, 2층이 있던 자리에는 사자 그림 한 점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루미나는 그림 뒤편에 계단이 있을까 싶어 벽을 두드려 보았지만, 그저 굳건한 벽뿐이었다.


마당으로 나온 루미나는 하얀 집 주변의 곳곳을 살폈다. 그러다 마당 끝 쪽으로 난 작은 통로를 발견했다. 통로는 사람 하나가 들어가기에 충분한 크기였으며, 반대편에서는 환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루미나는 그곳이 다음 길로 통하는 통로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모두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일주문 앞에 선 그녀는 절 안쪽을 눈으로 훑으며, 재빠르게 스님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곧장 벽장 쪽 창문을 넘어, 원래 머물던 방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여닫이 문을 두 손으로 꼭 닫았다.


그녀는 샘과 에드 부부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방과 방을 밀고 또 밀며 돌아가던중, 샘과 마주쳤다.


“엇! 샘!”


“루미나! 겨우 만났네.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에드 부부가 2층 방에서 내려갈 생각을 안 하잖아요.

그래서 화장실 가는 척하고 몰래 나오려 했더니, 카일라가…”


“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나갈 통로를 찾은 것 같아요.”


“정말요? 그 방에서 얼마나 더 가면 되죠? 에드 부부도 데려와야 하니까요. 되돌아갔다 나오려면 또 한참 걸리겠네요. 그죠?”


"아니, 우리가 헤어졌던 방에 벽 속에 숨겨진 창이 있었어요. 그 방으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돼요."


“그럼 에드 부부를 데려오죠!”


그녀들은 방에서 나와 하얀 집의 2층 입구에 섰다.


루미나는 카일라를 불렀고, 에드와 대화중이던 그녀는 허겁지겁 달려 나오며 루미나를 반겼다.


“카알라, 방의 방은... 아니, 방 속에 있는 이 방... 아니! 하얀 집이요!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았어요! 에드! 얼른 가요!”

루미나는 서둘러 달라는 듯 말을 건넸고, 에드 역시 다급하게 방에서 뛰쳐나왔다.


그들은 다시 스님의 방으로 향했고, 온 방이 엉망 징창이 되어 있는 광경을 본 카일라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이걸 전부 다 뜯고 부셨어요? 아까 봤을 때는 꼭 에드와 내 옷방 같았는데, 이제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엉망이 되었네요?”


“아.. 죄송해… 아니 아니, 여긴 카일라의 진짜 방이 아니에요. 그리고 벽지를 뜯어낸건, 보시면 아시겠지만 벽 안 쪽에 창문이 있거든요. 셋 중에 한 명이 열어봐요. 난 아까 열어봤으니까.”


“에드가 열어요. 이런 건 남자가 나서야지!”

카일라가 에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루미나는 여자잖아, 아무나 열면 어때서 그래?”

에드는 카일라의 말이 거슬렸는지, 투덜대며 창을 열어젖혔다.


시원하게 열린 창문 너머로 조금 전 루미나가 보았던 절 내부가 그대로 보였고, 이번에는 스님이 합장을 한 채 눈을 감은 채로 미소 짓고 있었다.


“아우씨! 깜짝이야!”

에드는 주황빛의 은은한 불빛과 붉은 기둥으로 지어진 절 내부의 위엄에 놀라 뒤로 주춤거렸다.


“자기, 완전 겁쟁이야. 여자 스님. 어머, 기도하고 계시나 보다. 저기요~ 저희는 꿈을 찾으러 왔어요~”

카일라는 컨디션을 전부 회복한 듯 보였다. 그녀는 나긋하고 교양 있게 말을 건넨 뒤, 그대로 창문을 넘어 스님이 계신 곳으로 향했다.


“아휴~ 카일라, 허락은 맡고 들어가야지. 그렇게 막 들어가서는…”

에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미나와 샘이 창을 넘었고, 그는 혼자 남을세라 재빨리 그녀들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스님은 우릴 못 봐요.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 분은 꿈의 숲에 원래 계시던 분이 아닌가 싶어요.”


“루미나, 그런 게 가능해요? 그동안 봤던 사람들은 꿈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거나, 이유가 있어 머무는 사람들이었잖아요. 안 그래요? 이분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에드, 그럼 이분은 왜 우릴 못 보죠?”


"그건 모르죠. 보이면서 안 보이는 척한다거나, 깊은 명상 상태이거나 뭐 그런 거 아닐까요? "


“지금은 명상 상태로 보이지만, 좀 전에는 나갔다 들어갔다 했다고요! 그런데도 절 못 봤다니까요.”


“그럼 확인해 보면 되죠. 뭐.”

에드는 스님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고, 이내 겁이 났는지 한 발자국 물러섰다.


“자기, 진짜 뭐 하는 거야~ 지금 깊은 명상 수행 중이잖아요! 우리 그냥 나가요. 다들 어서~”

카일라는 세 사람을 아이 다루듯 부드럽게 달래며 방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스님을 향해 우아하게 한마디를 건넸다.


“나무아미타불, 관세보살님. 죄송해요. 저희는 이제 갑니다.”


그들은 앞마당을 지나 일주문을 향해 달렸고, 얼마 뒤 다시 숲 속 길을 걷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머물던 하얀 집과 똑같이 생긴 집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그 곳을 향해 다가갔다.


"자기야. 여기, 맞지? "


"그러네, 우리가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 거야. 이건 영화에서 보던 그런 장면 있잖아… 무한루프?…"


"아니에요. 그런 거. 저도 처음에 같은 집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 집은 2층도 없고, 주변 숲이나 길도 우리가 알던 곳이 아닌 것 같아요"


카일라는 하얀 집 현관문을 열어 거실을 한번 쓱 훑어보고는 이내 다시 문을 닫았다.


“아니야, 확실히 다른 집이야.”


“난 또 계속 같은 곳에서 헤매는 그런 장면이 연출되는 줄 알았지…”


“그런 장르의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래, 에드.”


“당신도 같이 봤잖아.”


“난 당신이 보니까 본거지, 옆에서 졸고 있었다고, 빙글빙글 돌면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방에 갇힌 게 뭐가 재미있다고, 서너 번을 돌려 보는지...”


“카일라 당신은 매일 연애하고 뽀뽀하는 것만 들여다보고 있으면서 뭘~”


“아! 이제 두 분, 제 앞에서 사랑싸움 그만하세요! 여기서 한 번만 더 다투시거나 울기라도 하면, 두 분은 두고 우리 둘만 나갈 거니까요!”


“어머머~ 샘! 사랑싸움이라뇨~ 이 나이에 우리가 무슨 사랑을 해요. 그냥 저 이가 비꼬듯이 이야기하니까.”


“카일라, 비꼬는 건 자기 특기야.”


“호호호~ 맞아, 그런데 자기만 보면, 계속 놀리고 싶은데 어떻게 해? 이런 것도 사랑으로 봐주나?”

카일라는 팔꿈치로 에드를 쿡 찌르며 말했다. 하지만 에드는 그런 카일라의 신호에도 여전히 화가 덜 풀린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 분위기가 못마땅했던 샘은 루미나의 어깨를 돌려세우고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냥 우리끼리 갈래요?”


“에이~ 어떻게 그래요. 저녁도 아침도 맛있게 만들어 주고, 뭐, 조금 정신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곳 통로도 찾았잖아요. 이곳까지만이라도 함께 가요.”


“알았어요. 루미나, 말 따를게요. 그나저나, 통로는 어딨어요?”


“저쪽으로…”

샘과 루미나가 통로 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본 카일라와 에드도 그 뒤를 따랐다.


곧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돌로 만들어진 원통형의 작은 통로였다.


그곳을 기어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쑥스러워진 카일라는 말없이 맨 뒤로 물러섰다.


“난 맨 마지막으로 나갈래요. 다들 먼저 나가요.”


“당신을 두고 내가 어떻게 먼저 가. 당신이 앞에 서요.”


“에드 난 마지막!”

단호한 그녀의 표정을 본 에드는 다툼이 피곤했는지 알겠다는 손짓을 한 뒤, 몸을 숙여 통로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루미나와 샘도 차례대로 몸을 숙여 작은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빠져나온 세 사람이 몸을 털며 일어서자, 눈앞에 광활한 노란 유채꽃밭이 펼쳐졌다.


기어 나오는 자세 그대로 유채꽃밭을 발견한 카일라는, 그녀답게 서둘러 일어서려다 그만 통로에 머리를 '쿵' 하고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아얏!”


다들 카일라의 모습에 귀여움을 느낀 듯 웃어 보이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돌하르방이 있네요? 한국의 제주도인가 봐요?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온 듯 한 기분이에요. 정말!”


“돌하르방 아니에요. 카일라…”

샘은 못 말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르방 아니에요? 그럼 뭐지?”


“카일라, 돌부처잖아. 부처님 말이야.”


“나도 부처님 알아. 그냥 방금 머리 박아서 정신이 없어서 그랬어요. 내가 설마 돌하르방과 부처님 못 알아볼까 봐?”


셋의 대화 풍경에서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은 루미나는 또 한 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돌하르방… 큭큭큭… 죄송해요. 다들 지금 이 대화가…큭큭… 아 배야~ 눈물이 다 나네.”


"루미나, 난 하나도 안 웃겨요."


"샘은 당연히 안 웃기겠죠. 하하하, 난 너무 웃겨요. 큭큭큭."


“가만 보면 루미나는 웃음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잘 웃으니까 여기 유채꽃밭이랑 정말 잘 어울려요.

꽃 같아요~ 활짝 웃는 모습도 입 모양도 저기, 꽃봉오리 같기도 하고.”


카일라가 갑자기 대화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자 샘은 또다시 피곤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빨리 어디든 가시죠. 얼른 가요. 빨리빨리~”


“알았어요~ 샘. 샘은 은근 성격이 급하단 말이야?”


“카일라가 느린 거라는 생각은요? 안 해봤어요?”


“네?! 아… 난 그런 게 아니라…”

샘은 카일라를 대하는 태도가 또다시 쌀쌀맞아졌다.


그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에드와 루미나는 각자의 파트너의 등을 살짝 밀며, 유채꽃이 가득한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채꽃 향기와 맑은 햇살이 어우러져 서로에게 서운했던 마음을 녹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소 지으며 따뜻한 길을 함께 걸었다.



keyword
월, 수, 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