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깨우침!
9. 황금불상
-하나의 깨우침.-
등장인물: 루미나, 에드, 카일라, 샘, 도환(섬총각)
모두가 각자의 속도로 걷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잠시나마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고요를 맞이한 샘은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고, 루미나는 그런 샘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노란 개나리가 가득 피어 있는 길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번쩍번쩍 빛나는 동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엔 뾰족한 모자를 쓴 황금불상이 서 있었고, 그 옆에는 평범한 돌부처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거 진짜 금인가 본대?”
“순금은 아니겠지? 정말 커다랗다. 그죠?”
“황금불상이네요. 딱 봐도 신성해 보여요.”
“영물일 거예요. 이곳을 지키는…”
진지한 대화가 오가던 중, 에드의 돌발행동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가 황금 불상의 얼굴을 향해 크고 지독한 방귀를 뀌어버린 것이다. 충격에 휩싸여 모두가 멈춰 선 순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황금불상에서 예쁜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곧 그 입에서 아름다운 꽃잎들이 흩날리며 공중으로 퍼져나갔다.
꽃잎에서는 샘이 가장 좋아하던 자두꽃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 그녀는 좀처럼 보기 드문 모습으로, 향기에 이끌리듯 코를 살짝 킁킁대며 황금불상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에드! 정말 못살아! 이게 무슨 불경한 짓이야! 방귀를 왜 거기서! 못 말려 자기!”
“허허허. 아~ 그럼 나오는데 어떻게 참아~ 당신도 못 참고 뀌어대잖아. 이 나이면 다 방귀 못 참아. 그리고 참으면 병돼.”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던 루미나는 무언가 깨달은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뒤따르던 샘은 여전히 그들의 행동이 불편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루미나는 황금 불상 앞에서 공손하게 합장했다. 그날... 그 짧은 순간의 감동이 오랫동안 그녀의 기억에 깊이 새겨졌다.
그들은 숲 길을 따라 다시 걸음을 옮겼다. 꿈의 숲에서는 모든 길이 숲으로 이어져 있었고, 숲을 지나야만 다음 길로 갈 수 있었다.
그렇게 걷고 있던 그들 앞에 돌계단이 나타났고, 그들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곳에는 작고 낡은 정자와 마을 토박이처럼 보이는 한 섬총각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들을 반기듯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남자는 그들을 정중히 초대하며, 자신이 직접 재배했다는 화채와 다양한 과일을 푸짐하게 대접했다.
루미나와 일행들은 꿈의 숲에서 집을 짓고 살아가는 섬총각이 신비롭게만 느껴졌다. 그는 꿈의 숲에서 이미 희망을 찾은 듯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런 것이 가능하군요? 시골 살이 같아요. 완벽 적응하셨겠는데요?”
“아이~ 그럼요. 제가 이곳에 들어올 때쯤이… 그 눈이 오는 한 겨울쯤이었거든요? 뭐 여기서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전혀 모르니까, 그런 점에서 저는 오히려 좋더라고요. 괜히 사람들하고 경쟁하며 살아가지 않아도 되고, 오면서 느꼈죠? 굳이 음식을 먹지 않아도 이곳에서는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요. 그런 점에서만 보면, 이곳 꿈의 숲은 천국이나 다름없을 거예요.”
“그럼, 더 이상 꿈을 찾아 나서지 않으시려는 거예요?”
루미나는 그가 그곳에 정착한 진짜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자는 무릎을 '탁'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꿈! 저는 이미 이곳에서 꿈을 만들었어요. 외부의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삶이죠. 마치 무릉도원 같은 숲에서 그저 이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을… 왜 그렇게 꿈을 좇으며 살아가야 하는 거죠? 무엇을 위해서요? 배고픔도 더 이상 없는데 뭘 더 가져야 만족한다는 거죠?”
남자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 그의 태도에 루미나는 자신이 기분을 상하게 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 루미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자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쪽은 꿈을 찾으러 여기에 온 거예요? 꿈을 찾기 위한 여정은 어떠셨는지요? 그래서 무얼 얻었죠? 꿈은 찾았어요?”
“저는…”
무거운 분위기를 직감한 샘은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루미나와 난 운명의 이끌림에 따라 꿈의 숲으로 오게 되었어요. 이미 꿈을 찾으셨다니, 더 이상의 여정은 필요 없겠네요. 꿈같은 곳에서… 더 이상 먹을 것이 필요 없지만, 열심히 식재료를 재배하고, 언제 올지 모를 사람들을 기다리면서요.”
“어허~ 이런, 두 숙녀분들께 무례한 질문이 되었나요? 어떠한 의도도 없이 그저 이곳을 들렀던 모든 분들께 드렸던 공통된 질문이었어요.”
루미나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애써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던 그녀의 입에서 말이 새어 나왔다.
“샘… 그전부터 느낀 건데, 사람들이 나에게 곤란한 질문을 할 때마다 왜 자기 일처럼 그렇게 나서서 감정 소모를 하는 거야?”
“내가? 아… 그건, 루미나가 호기심에 던진 말들에 사람들이 당황할 때가 종종 있어 보여서… 나도 모르게 루미나가 공격당한다고 생각했나 봐, 그래서 보호 본능이랄까?”
“응, 고마워. 하지만… 나 스스로 대화를 하는 편이… 샘도 언젠가 꿈을 찾아 떠날 테고, 그때는 나 혼자서 이겨나가야 하니까. 그러니까… 이제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어머~ 왜 갑자기 이별하는 듯한 말을 하는 거예요? 루미나? 설마 혼자 가려고요?”
“아… 아뇨. 여기 계신 분들이 지금은 이렇게 여정을 함께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의 길과 속도로 걷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탈렌…, 항해사님처럼 꿈을 찾아 떠날 테니까요.”
“그런 걸 뭘 미리 걱정해요~ 루미나, 안 그래요? 그냥 지금 여기 젊은 총각이 내어주는 화채나 실컷 배부르게 먹고 떠나자고요~ ”
“제가 분위기를 안 좋게 만든 것 같네요. 죄송해요.”
“루미나가 죄송할 일은 아니니 너무 마음 쓰지 마요.”
샘은 루미나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두 분은 원래부터 친구사이예요? 아니면 지인?”
섬총각은 루미나와 샘, 두 사람의 우정의 깊이가 깊다는 인상을 받은 듯 질문을 이어갔다.
“아니요. 동료요. 우린 각자 다른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출발했고, 그렇게 여정을 시작하다 만났어요.
어쩌면… 루미나, 그녀가 없었다면 나 역시도 이곳에 없었을 수도 있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고마운 마음을 과잉보호로 표현하고 있었나 보네요. 죄송해요. 무례했다면 사과드릴게요.”
“아뇨~ 전혀요. 샘의 말처럼 난 꿈을 찾으러 들어오긴 했지만, 뚜렷한 목표와 열정은 없었어요. 찾고 싶다는 미련만 조금 남아있을 뿐이었고요. 어쩌면 현실 세계에서 난 모든 꿈을 다 거쳐 이곳에 도착했는지도 모를 일이고요.”
“그렇군요. 이 꿈의 숲에서 정착한 사람들 중 유일하게 이미 꿈속에 살고 계신 분을 우리가 만나게 된 거네요~ 이거 영광입니다. “
에드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분위기를 띄었고, 서먹하던 분위기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섬총각은 여기저기 흘러내린 단발머리를 질끈 묶으며, 코 중앙까지 내려온 검정뿔테 안경을 쓱 밀어 올렸다.
에드는 오랜만에 동족을 만난 듯 즐거워하며, 섬총각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퍼부어댔다.
“평소에 운동을 좀 하셨나 봐요.”
에드는 총각의 이두와 삼두근을 꾹 누르며 말했다.
그는 쑥스러운 듯이 웃었지만, 그도 운동에 꽤 진심 같아 보였다. 그는 자신의 몸 구석구석에 힘을 주며, 자신의 운동 이력에 대해 에드와 오랜 시간 수다를 떨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들은 그들의 대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였고, 카일라는 은근슬쩍 콧노래를 부르는 척하며, 주변 여기저기를 구경하듯 어슬렁 거렸다.
그들의 대화를 지켜만 보고 있던 샘과 루미나도 이때다 싶었는지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남자들은 운동이야기하면, 한도 끝도 없어. 이럴 때는 적당히 맞장구 쳐주다가 눈치 봐서 빠지면 돼요.”
에드와 부부 동반 모임을 할 때면, 카일라는 늘 이런 경험을 하는 것 같았다.
그녀들은 숲으로 난 민들레 꽃길을 걸으며, 숲이 선사한 아름다운 풍경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소녀가 된 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어머! 민들레 홀씨가 이렇게 아름답게 흩날리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봄에서 여름 사이에 씨앗을 퍼트려요. 산에는 잘 안 다니시나 봐요.”
“네, 맞아요. 루미나, 우릴 보면 알겠지만, 꿈의 숲 여정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런 곳에 이렇게나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겠죠. 평소에 벌레도 정말 싫어해서, 깊은 산은 좋아하지도 않고요. 위험하기도 하고. 곰이라던지…”
"곰? 산속은 벌레가 많죠. 인간은 벌레를 보면, 불쾌해하고 쫓아내려고 안달하죠. 잘 생각해 보면 벌레가 사는 터전에 인간이 침범한 것뿐인데도요. "
“샘의 말이 맞아요. 그래서 인간의 터전인 집에 벌레가 나오면, 방역을 하기도 하는 것처럼요. 정말 숲 속의 벌레들에게는 그곳의 주인이 자신들이겠어요.”
카일라는 샘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부정할 수 없는 그녀의 통찰력에 감탄의 박수를 보냈다.
에드는 오랜만에 자신과 같은 성별의 남자를 만나 반가운 마음에, 섬총각에게 그동안의 모험담을 들려주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성함도 모르고 계속 말만 했네요! 카일라… 아, 카일라는 저기 긴 머리의… 어쨌든, 저기 손뼉 치고 있는 여자가 제 피앙세, 카일라예요. 카일라가 계속 ‘섬총각, 섬총각’ 하길래, 정작 이름을 여쭙는 걸 깜빡했네요. 성함이…?”
|"도환이에요. 좀 촌스러운 이름이죠?"
“아뇨! 촌스럽다니요. 오히려 강직한 느낌이 들어서 멋진데요, 뭐~ 그나저나 도환 씨는 계속 이곳에 머물면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잠시 머물 수 있는 집이 되어주시려는 건가요?”
"뭐, 그런 셈이죠. 꼭 휴식처가 되기를 자처한 것은 아니지만, 혼자 있다 보면 가끔 지루해질 때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는 동시에 저도 잠시나마 외부 세계와 연결감을 느낄 수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도환 씨, 이곳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다 보면 다시 돌아가지 못할까 두렵거나 하지 않나요? 영원히 꿈의 숲에서 살아가는 거니까요. 만약 이곳에서의 시간이 무한하다면, 어느 날 외부 세계로 나가고 싶어졌을 때, 그동안 보던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아, 가끔 생각해요. 그렇다고 두렵지는 않아요. 아마 외부 세계로 나가고 싶을 때는, 더 이상 이곳의 삶이 아름답지 않을 때일 거예요.”
“그럼 저희랑 함께 가죠! 혹시 일자리가 필요하거나 잠시 머물 곳이 필요하면 말하고요. 커다란 별장도 하나 가지고 있어요. 정원사나…”
“아니에요, 에드. 진정 좀 해요. 나는 당분간 여기서 나갈 생각이 없어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지금 이곳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르고요. 이곳에 정착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막상 이야기를 들어보면 각자 자신만의 이유가 있어서 머물고 있다는 걸 느껴요.”
“우리 부부는 여정 내내 정착한 사람을 본 게 도환 당신뿐이었어요. 아! 여자 스님도 계셨지만, 꼭 NPC 같아서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여승을 보셨어요? 여기 절이 있던가요?”
“도환씨는 확실히 우리와는 다른 길로 왔군요?”
“그렇죠. 정말 다이내믹했어요. 어떤 길에선 주저앉아 한참을 울고 싶었던 적도 있었으니까요.”
“여정 내내 혼자였어요? 설마?”
“아뇨,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고등학교 동창 셋이서 함께 방문했었어요. 여정 도중 각자 어린 시절 꿈을 찾아 떠났고, 지금쯤은 아마 외부 세계에서 꿈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겠죠.”
"그들이 그립지는 않나요?"
“글쎄요, 아직까지는요. 힘들 때 서로 위안이 되어주던 친구들이기는 하지만, 마지막까지 함께할 수는 없잖아요.”
“왜 함께할 수 없어요? 할아버지가 되어도 함께 지내면 되죠, 이 나이에도 친구들 만나면 티격태격하느라 정신은 없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 가끔 파티를 열어 아이들 자라는 모습도 보고, 좋은 정보도 얻고요.”
“그렇죠. 에드 나이면 아직 고령은 아니에요. 하지만 나이가 들고 죽음이 가까워질 때, 그들뿐 아니라 저 역시 누구와 함께할지는 알 수 없으니까요. 죽음은 결국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무게이기도 하고요. 물론 천국이나 극락왕생 같은 게 가능하면 더할 나위 없고요. 하하하.”
도환은 연장자인 에드 앞에서 죽음 이야기를 꺼낸 것이 쑥스러웠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멀리서 루미나 일행이 돌아오는 것이 보이자, 에드는 그녀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저는 이제 가봐야겠네요. 저 숙녀분들 전부 꿈을 찾아 보내드려야죠. 도환 씨처럼, 정착 생활을 할 사람들은 아니니, 시간을 아껴야겠어요.”
“그래요. 에드. 정말 반가웠습니다.”
“꿈의 숲에 편지라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렇죠?”
“그러니까요. 하늘에다 대고 외쳐 볼까요?”
“하하하. 답을 해줄지 알 수가 없네요. 어! 카일라 이제 그만 출발하자고!”
“알았어, 우린 벌써 준비되었어요. 에드.”
루미나와 샘, 그리고 카일라는 섬총각 도환 앞에 나란히 인사를 건넸다. 에드와 그녀들을 배웅하러 나선 도환은 숲길로 그들을 안내했다.
산길 초입에 있는 작은 암자, 그곳은 섬총각 도환이 자주 들러 명상하던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루미나 일행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 섬총각 도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미나는 그의 얼굴이 돌부처의 형상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루미나는 섬총각을 만나기 전 마을 초입에 놓여 있던 황금불상을 떠올렸고, 그 아름다운 장면과 지금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광경을 생각하며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진정으로 바랐던 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