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시작!
11. 할머니, 저 이제 가요!
-치유의 시작-
등장인물: 루미나, 할머니(해연), 도윤
루미나는 어느새 커다란 항구에 도착해 있었다. 꿈의 숲에서 보았던 신비로운 바닷가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너무나 익숙한 항구의 모습에, 문득 회 한 접시와 조개구이가 떠올랐다.
“음~ 어딘가, 조개구이 집이 있을지 모르겠어. 갑자기 군침이 도는데?”
바닷가의 진한 향이 그녀의 코를 가볍게 찔렀고, 여기저기 정박해 있던 배들도 눈에 띄었다.
루미나는 항해사 탈렌과 헤어진 뒤, 배를 몰아본 적은 없었지만 지금 당장에라도 배를 타고 섬을 탈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의 발목을 잡은 것은 그녀 스스로의 마음이었다. 루미나는 샘과 에드 부부를 허무하게 놓친 뒤, 쭉 홀로 숲 속의 길을 걸었고, 혼자만의 여정에 익숙해진 탓이었을까? 여러 척의 배가 놓여 있음에도 섬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익숙한 항구 주변을 맴돌다 작은 마을을 발견하였다.
파란 지붕의 민박집 앞을 서성이던 중,
그곳에 터를 잡은 노인을 발견하고는 반가움에 그대로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마당 안, 마루에는 분홍 고쟁이 바지와 늘어진 흰 티셔츠를 입은 은빛 곱슬머리를 한 할머니가 걸터앉아 있었다.
루미나는 오랜만에 마주한 사람에게 반가운 마음이 들었고,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노인에게 다가갔다.
“이곳에 사시는 거예요? 할머니도 이 마을에 오래 정착하셨나 봐요. 저는 혼자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이곳에 오게 되었어요!”
할머니는 쾌활해 보이는 루미나를 따뜻하게 반겨 주셨다.
“참말로 간만이네. 이 섬에 새 사람이 오는 일이 다 있구먼?”
“이곳에 정착한 분들은 대부분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다 함께 살아도 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각자의 뜻에 따라 정착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죠?”
“뭐라고~? 각자 길? 뭐 어쩌고 저쩌고 한다고?”
“그러니까... 제가 거쳐왔던 길들은 숲이거나 바다 거나 이상한 방은 물론이고... 또...”
“아이고야, 그리 돌아다녔어?... 그러다 결국 네 발길이 이 동네에 붙잡힌 거 아녀?”
“아하하, 맞아요. 할머니, 제가 걸어온 길마다 참 색다르고 힘들었지만, 동료들도 만나고 해서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요.”
“그려, 그럼 되었지머~ 그래서 얼마나 머물다 가시려고?”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할머니. 그나저나 할머니는 어떻게 이곳에 정착하게 되신 거예요?”
“나? 글쎄... 내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우리 아들, 사랑하는 우리 아들이 꿈의 숲 속으로 떠난 뒤 감감무소식이 되었어. 이 늙은이가 무슨 어릴 적 꿈을 이루겠다고 이곳에 왔겠나. 마지막이라도 우리 아들 얼굴 보고 싶어서 왔는데, 걷다 보니 젊은이들도 만나고, 아이들도 만나고,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 마다 우리 아들 본 적 없냐고... 사진도 없지, 뭘 입고 갔는지도 모르지... 찾을 길은 없지... 그런데 자네처럼 한 젊은 여성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줬지. 계속 앞으로만 가면, 오히려 길이 어긋날 수도 있다고. 그 말을 들은 뒤, 이곳 마을을 발견했고, 혹시나 내 아들이 여기를 지나치진 않을까 싶어서... 이렇게 민박집을 하며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러셨군요. 혹시 아드님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나요? 제가 본 사람들 중에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할머니! 처음 숲에서 길을 선택하셨을 때요, 비가 왔나요?”
“응? 가만있어보자. 그러고 보니, 난 이곳에 온 후로 비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없어. 가끔 이상하다 생각은 했지.”
“그렇군요. 혹시 아드님 인상착의는...”
“우리 하람이? 키는 산처럼 크고, 운동을 좋아해서 까무잡잡한 게 아주 잘생겼지~ 효자중에 효자야…”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자, 할머니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셨다.
“음, 할머니. 할머니 성함은 어떻게 되세요? ”
“내 이름? 해연이야, 해연. 근데 그건 알아서 뭐 하려고?”
“제가 섬에서 나가게 될 때 기억해 두려고요. 혹시 모르죠. 저와 마주칠 수 있을지도요. 아드님의 꿈은 알고 계세요?”
“어릴 적 꿈? 알고 있지. 아니, 숲으로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됐어. 아들 방에 남겨진 오래된 일기장에서 봤거든.”
“그래요? 혹시 전원생활이라던지, 뭐 명상과 관련된 건 아닌가요?”
“그게 뭐여? 뭔 상?”
“아뇨, 하하하. 시골 생활을 하고 싶어 했다거나... 뭐 농작물 재배, 화초 기르기 뭐 이런 거에 관심이 있지 않았나 싶어서요.”
“가끔 바닷가로 여행 다니고, 산도 오르고 그런 건 봤지만, 뭔가를 가꾸거나 기를 녀석은 아니야.”
“음... 안경을 쓰고 있진 않았나요?”
“안경? 아니~ 내 아들은 눈이 좋아.”
“아, 그렇다면 섬총각은 아니네요.”
“섬총각?”
“요전에 머물렀던 곳에서 마주친 분이 계셨거든요. 그분도 정착하신 지 꽤 되셨다고 하셔서.”
“그 총각도 키가 아주 훤칠하고 까무잡잡해?”
“아무래도 시골 살이를 하니, 까무잡잡하기는 하죠. 대신 검정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어요.”
“에이~ 아니야. 내 아들 안경 안 썼어. 우리 아들은 운동을 참 잘했어... 그래서 학교 선생님들도 매번 운동시키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못 하게 하셨군요? 그럴 수도 있죠. 요즘이야 선택지가 많지만, 그땐 돈도 많이 들고, 뒷돈 없이는 성공하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바로 그거야. 성공... 그게 무어라고 그냥 한번 시켜나 볼걸. 그렇게 좋아하던 운동을 못하게 한 뒤로 그 녀석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 평범한 회사에 취직해 오랜 시간을 출근하고 퇴근하길 반복하다, 어느 날 메모 한 장 써놓고 사라졌어.”
그녀들은 한참 동안 마루에 걸터앉아 오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가 저물고 달이 차오를 무렵, 멀리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해연 할머니! 누가 오나 봐요!”
루미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화들짝 놀라며, 해연 할머니에게 바짝 붙어 앉았다.
“아이~ 걱정하지 마~ 옆방 학생이야.”
“학생이요? 무슨 학생…”
“할머니, 다녀왔습니다.”
“그려~ 잘 다녀왔어? 꿈은 아직 못 찾았고? 나가는 길도?”
“네, 할머니. 어? 누구세요?”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학생이 다가오며 물었다.
“나는 루미나라고 해요. 학생? 맞나요? 학생은 이름이 어떻게…”
"저는 도윤이라고 해요. 이 섬에서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오신 거죠?"
도윤은 루미나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도윤은 날렵한 체구에 선명한 이목구비가 돋보이는 소년이었다. 강한 자기주장이 얼굴과 눈빛에 고스란히 드러나, 누구에게도 쉽게 휘둘리지 않을 단단한 기운을 풍겼다.
“나는 배를 타고... 또 걸어서도 왔어. 이곳 까지는 방타고 왔고.”
"방이요? 하하하. 무슨 방을 타고 와요? 여기 방도 바다에 떠다녀요? 아니면 방으로 된 자동차나 열차라도 있었어요?"
“아니, 그 방 탈출 게임 알지? 그런 것처럼, 방 타고 왔다고...”
문득, 그녀의 기억 속에 샘과 에드 부부가 스쳐 지나갔다.
루미나의 표정을 본 도윤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주머니에서 커다란 소라 껍데기 하나를 꺼내 조심스레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여정이 많이 힘드셨나 봐요. 저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외롭기도 하고,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기도 했거든요."
루미나는 도윤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도윤은 루미나의 표정을 보더니 환하게 웃음 지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혼자 걷다 보니, 오히려 누군가와 함께 걸을 때보다 길을 찾는 게 두렵지 않았어요. 물론, 처음에는 외롭고 도망치고 싶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익숙해지고 적응하다 보니, 어느새 길 찾기의 전문가가 되어 있더라고요.”
"나도 너와 비슷한 경험을 했어. 이 외부세계... 그러니까..."
"외부세계와 닮은 이곳 말이죠?"
“응, 맞아. 이 섬에 오기 전 나는 혼자 남겨졌어. 처음엔 두렵고 초조해서 얼마나 헤매고 다녔는지 몰라. 잠결에 사자도 봤다니까…”
“사자 봤어요? 나도 사자를 봤는데.”
“어디서? 너도 상점에 갔었니?”
“바닷가 오기 전에는 다 상점뿐이잖아요. 음식점이나 그런 곳 말이에요.”
“그건 그렇지.”
"저는 사자가 가는 곳을 따라 걷다 보니 이곳으로 오게 된 거예요."
“사자가 이곳으로 안내했단 말이야?”
“아니에요, 안내라기보단 멀찍이 떨어져서 일방적으로 따라간 거죠.”
도윤과 루미나의 대화가 길어지자, 해연 할머니는 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다 사자 이야기가 나오자 할머니는 번쩍 눈을 떴다.
“우리 몽실이! 몽실이를 봤어? 너희들?”
"할머니 무슨 몽실이야? 잠꼬대 하나 보다. 할머니 이제 들어가자. 피곤하시겠어."
"엣끼! 잠꼬대는 무슨! 우리 몽실이 말하는 거 아니여. 북실~ 북실한 털에 사람 이빨을 한 그 녀석, 우람한 체격의 우리 몽실이."
"할매, 갑자기 왜 그래~ 무섭게."
지금껏 사자 이야기에 침묵하던 할머니가 갑자기 '우리 몽실'이라며, 알 수 없는 말들을 하자 도윤은 그녀의 낯선 행동에 몸을 뒤로 쭉 뺐다.
“아이고, 그 사자 말이지. 너희가 본 그 녀석, 내가 여기 올 때부터 저 마당 너머로, 날 찾아오던 말동무였어.
혼자 있으려니, 얼마나 적적하던지, 속이 다 답답해지던 날. 바닷가에 앉아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북실북실한 녀석이 내 옆으로 다가와 앉더라고. 처음엔 너무 놀라서 ‘꺅’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 몽실이 녀석은 쿨쿨 자고 있더라고. 그 녀석도 외로웠던 거야. 아마 이 섬에 사자는 저 녀석 한 마리일 테니까. 그때부터 친구가 되었지. 현실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몽실이 녀석은 저 마당 밖에서 항상 날 보러 왔었어.”
“그럼 그 사자는… 아니, 몽실이는 어디로 간 거예요?”
“그건 너희가 더 잘 알지. 봤다며? 고 녀석 오랜 시간 정들었는데, 이 도윤이 녀석이 오고 나서부터 한 번도 찾아오질 않네! 매정한 몽실이...”
"할머니, 근데 왜 몽실이야? 정말 안 어울린다. 밀림의 사자, 왕인데 말이야. 몽실이라니 큭큭큭. 할매 답긴 하네."
"욘석이! 몽실이가 어때서! 딱 잘 어울리는 구만, 복슬복슬한 게 딱 몽실이잖아?"
루미나는 할머니와 도윤의 대화를 듣는 내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꿈의 숲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함께해 온 가족처럼 느껴졌다.
대화를 마친 해연 할머니와 도윤은 부엌에서 감자를 들고 나와 루미나에게 내밀었다.
“감자요.”
도윤은 감자를 한 입 베어 문 뒤, 다른 손에 있던 감자 하나를 루미나에게 건넸다.
“고마워, 잘 먹을게. 잘 먹겠습니다. 할머니.”
“그려 그려! 얼른 잡숴.”
그날의 하늘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초롱초롱 빛났다. 까만 밤하늘에 가득 메워진 별들을 바라보던 루미나는
모든 것이 평화롭게 느껴짐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늦은 밤, 모기떼가 극성을 부렸고, 할매와 도윤은 부엌에 있던 장작을 몇 개 가지고 나와 마당에 작은 모닥불을 피웠다.
루미나는 집의 따뜻한 온기를 가득 받으며, 깊은 잠에 빠졌다.
“루미나!”
잠결에 들려온 샘의 목소리에 루미나는 잠꼬대를 하듯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대답하려 애썼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새벽 공기가 온 방안을 적시고 있었고, 옆 방에선 해연 할머니의 기침 소리만 고요함을 뚫고 들려왔다. 루미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도윤과 할머니의 정겨운 대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할매~ 이번에는 꼭 찾을 수 있다니까? 두고 봐~”
도윤은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으며, 해연 할매에게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그런 도윤의 모습이 우습다는 듯 할머니는 큰 소리로 웃어댔다.
“하하하, 녀석아~ 낮이 되면 나가고, 밤 되면 들어오고, 그러기를 얼마나 여러 번 반복했을라고. 이제는 안 믿어.”
“할매~ 그러다 나 진짜 꿈 찾아 떠나면 어쩌려고 그래. 할매 혼자 괜찮겠어? 뭐 이제 저 누나 있으니까 괜찮다 이거야?”
도윤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어딘가 서운한 기색이 묻어났다.
그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루미나는 방문을 열고 나와,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도윤아 너 어딜 가려고?”
“꿈은 찾아봐야죠. 뭐, 갈 데라곤 바닷가뿐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한 번은 찾아봐야 하잖아요.”
“너, 꿈의 숲에서 배 말고 다른 이동수단은 못 봤어?”
“네. 저는 그 음침한 길에서부터 계속 배만 타고 왔어요. 왜요?”
“그럼 다시 배 타고 나가면 되잖아?”
“저는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이에요. 배 몰 줄 몰라요.”
“그럼 여기까지 누가 데려다준 건데?”
“어떤 아저씨들, 음 한 번은 예쁜 누나도 있었고요. 그건 왜요?”
“그 사람들도 결국 꿈을 찾은 거구나? 그래서 넌 여기 남은 거고.”
“네, 그런 것 같아요. 하늘에 이상한 글씨 같은 것도 잠깐 보였던 것 같고요.”
“혹시 죽은 사람은 없었지?”
“에? 누나, 왜 그래요~ 갑자기 찜찜해졌잖아요.”
“아니, 진짜 죽었다는 건 아니고... 나도 그런 일들을 겪어봐서.”
“저 이제 갈래요. 할매! 두고 봐 오늘은 기필코 꿈 찾아 떠난다!”
도윤은 할머니와 루미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려 인사했다. 그리고는 힘차게 마당 밖으로 뛰어나갔다.
“도윤이 어디 가는 거예요?”
“도윤이가 그러더라. 섬이 꼭 바다로만 다녀야 하는 건 아니라고. 나도 그건 알고 있지. 그렇지만 모든 섬이 다 그런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저 녀석이 매일 나가서 애쓰는 거 보니 안쓰럽더라고. 내 욕심으로는 손주 같은 저 녀석이 곁에 있었으면 싶은데, 녀석 입장에선 늙어가는 할매랑 있는 게 뭐가 그리 재미있겠냐고... 적어도 또래 친구들 만나서 모험이라도 다니는 게 나을 걸~”
해연 할매는 도윤이 떠난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한동안 서성였다.
"할머니, 저와 함께 이 섬을 떠나실래요?"
루미나는 결심한 듯 물었고, 할머니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안 돼~ 내 아들내미 오면 어쩌려고. 안 돼, 걱정 말어. 도윤이 녀석이랑 루미나 씨, 다 떠나도 난 외롭지 않아. 몽실이 녀석이 또 올 테니까. 그 녀석이 낯을 가려서 아직 내려오지 못하는 걸 거야. 저기, 저 뒷산 어디쯤에서 지켜보고 있을걸?”
할머니는 뒷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루미나는 잠시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겠다 말한 뒤, 항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흔들리는 배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섬을 떠날지 아니면 이곳에 머물지 깊은 고민에 잠겼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마음 한 편의 파도가 거칠게 출렁였다.
‘이곳을 벗어나야 할까? 하지만... 아직 이곳이 따뜻하게 느껴져. 어쩌면 이곳에서 발견하지 못한 꿈의 단서를 찾아낼지도 모르고 말이야.’
'아니야! 루미나, 정신 차려! 너 여기서 정말 정착하고 싶은 거야? 처음 꿈의 숲에 왔을 때를 기억해. 너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고, 그러다 혼자가 됐잖아. 남들 다 꽃길 걸을 때, 너는 엉뚱한 길에서 헤매었어!'
그녀의 생각들이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는지, 루미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소리쳤다.
“그만! 그만! 나도 안다고! 나도 알아!! 그렇지만 결국에는 한 곳에서 만났잖아!!! 나의 길은 틀리지 않았어! 그때의 운명이 날 그곳으로 이끌었을 뿐이야! 내가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루미나는 허공을 향한 대화를 이어갔다.
그동안 그녀 안에 쌓여 있던 수많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흑... 흑...”
그녀는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숲 속에 홀로 남겨졌을 때도, 동료들이 하나둘 떠나갔을 때도 그녀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긴 여정에 쌓인 고통은 너무나 컸고, 억눌러왔던 감정들은 한꺼번에 폭발하고 말았다.
그녀는 목 놓아 흐느끼며, 오랫동안 가둬두었던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았다.
잔잔하던 바다의 파도는 점점 거세져, 그녀의 울음소리를 품어 안았다. 한참을 흐느끼던 루미나는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 듯 눈가를 닦고, 힘없이 몸을 이끌어 터벅터벅 파란 지붕의 민박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기운 없는 몸을 이끌고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고, 이내 옆으로 쓰러지듯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엌에서 생선 굽는 냄새가 노릇하게 퍼졌다. 그릇들이 서로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루미나의 눈앞으로 사자 한 마리가 나타났다.
“꿈인가…”
사자는 어슬렁어슬렁 마당을 몇 바퀴 맴돌다 조용히 마당 밖으로 사라졌다. 루미나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꿈속에서 그녀는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공간에 서 있는 자신을 마주쳤다.
“루미나 씨 일어나 봐... 뭐라도 좀 먹어야지. 오늘은 맛있는 고기반찬이야. 도윤이가 낚시해서 잡아온 것도 있고, 내가 어망으로 잡아 말려둔 고기로 이것저것 좀 만들었어. 어여~ 일어나 봐~”
루미나의 두 눈은 울음으로 퉁퉁 부어올랐고, 코끝과 입술도 슬픔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해연 할머니는 그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루미나의 슬픔을 녹여줄 생선찜과 따뜻한 국물을 정성껏 내어주었다. 할머니의 손길은 그 어떤 말보다 따뜻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잘 먹어야 돼. 아무리 꿈의 숲이라 해도, 사람이 먹는 습관을 쉽게 끊을 순 없잖아? 모든 건 천천히 익숙해져야 탈이 없지. 얼른, 식기 전에 어여 먹어.”
“네, 할머니.”
루미나는 정성스레 준비된 음식을 천천히 삼키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방으로 돌아가 몸을 눕히고 깊은 잠에 빠졌다.
“할매, 저 누나 참 일찍도 잠들었네? 내가 차돌 주워왔는데 보여주려고.”
“아이고, 차돌 부딪히면 불나는 거 보여주려고? 그거 내가 가르쳐준 거지?”
“어, 할매. 그러니까 누나한테는 비밀이야. 내가 보여주려고.”
“욘석아, 저 누나가 너보다 더 잘 알 텐데? 뭘 알려줘 알려주기는!”
“이걸 알아? 어떻게? 저 누나도 할매한테 배웠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욘석아, 어여 너도 들어가 자. 심심하면, 저 바닷가나 가서 혹시 내 아들놈 오나 보고 오던지.”
“칫! 할매 아들을 내가 왜 기다려? 나도 그럼 일찍 잘래! 내일은 더 일찍 찾아다녀봐야지~ 나 잘게 할매~ 잘 자!”
쿵—
“욘석아! 문 좀 살살…”
"바람! 바람이야! "
섬의 하루는 오늘도 평온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루미나는 밤새 뒤척이며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이마엔 식은땀이 맺혔고, 이따금 작게 숨을 헐떡이듯 뱉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고통에 몸을 움켜쥐고, 잠꼬대인지 흐느낌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꿈속에서도 그녀는 두 팔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고 있었다. 마치 눈물조차 꿈을 피해 가지 못한 듯, 그녀는 오래도록 울고 있었다.
“하... 하...”
밤새 앓고 난 뒤, 루미나는 마치 긴 터널을 지나온 사람처럼 천천히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동이 터오는 푸른 새벽의 하늘을 바라보며, 바닷가로 향했다.
몸은 한결 가벼웠고, 머릿속을 짓누르던 무거운 생각들도 자취를 감춘 듯했다.
그녀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떠나자.”
날이 밝자, 루미나는 조용히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맑게 개어가는 하늘 아래, 도윤과 해연 할머니 앞에 선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결심한 듯 이야기했다.
“이제 떠나려고요.”
“누나! 나갈 수 있어요? 길을 알아요?”
“응. 나 배를 운전할 수 있어. 꿈의 숲에서 배웠거든.”
“네? 그런데 제가 그렇게 헤매고 다닐 때 그냥 보고만 있던 거예요?”
“아니, 그때 난... 나갈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해연 할머니는 도윤의 꿀밤을 때리며 말했다.
“도윤아~ 널 위해서 이 누나가 억지로 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 얼른 사과드려라.”
“할머니! 이건 아동학대야!”
“한 대 더 맞을텨? 학대? 내가 어디 너한테 손댄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 욘석이 갑자기 어리광은 다 큰 녀석이 말이야.”
“그게 아니고... 할매, 근데 혼자 있을 수 있어?”
“너 하나 간다고 이 할매, 외롭지 않어. 몽실이가 온다고 했잖아.”
도윤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무언가 말하려다 끝내 내뱉지 못한 듯, 입술을 꼭 다문 채 곁에 서 있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한마디만 더 하면 금세라도 울음이 터져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할매, 정말 혼자 있을 수 있어?”
“욘석아!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괜찮다니까! 어서 누나 따라가! 이번 기회 놓치면, 다시는 못 나갈지도 몰라~ 어여가.”
할머니의 말투엔 애써 담담하려는 마음과, 다 말하지 못한 애틋함이 묻어 있었다.
그들의 이별은 루미나의 발걸음까지 무겁게 만들었다.
마당을 나서기 전, 도윤과 루미나는 해연 할머니를 꼭 껴안으며, 서로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할머니, 건강하세요. 저는 이만 가요. 신세 많이 졌습니다.”
루미나는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 옆에서 쭈뼛거리던 도윤은 잠시 망설이다 해연 할매를 와락 품에 안았다.
“할매, 할매는 내가 사랑한 유일한 할매야! 헤헤.”
“그래, 고맙다! 어여가! 건강하고! 밖으로 나 가거든, 내 아들 녀석 만나면 꼭 좀 전해줘! 엄마, 여기 있다고!” 보트가 바다를 가르며 멀어지자, 해연 할매의 모습은 점차 점처럼 작아지더니,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