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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

3분의 기다림

by 빨강



저기 파란색 신호등이 막 켜졌다. 골목의 끝에서 켜진 신호등을 보고 뛸까 말까 삼초 간 고민한다.

다음에 건너지 뭐.


신호등에는 늘 다음이 있다. 3분을 기다리면 신호는 다시 파란불로 바뀌었다.


학교 앞 건널목에는 신호등이 있었다. 그 길을 건너야 집에 갈 수 있었다. 딱히 집에 가고 싶었던 건 아니다. 아이들이 그렇듯이 집 말고는 갈 데가 없었을 뿐.

내가 문구점을 들려 연필이나 볼펜 따위를 집어보느라 하교 시간이 한 시간이 넘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찾는 곳이 없는 세상에서 나는 늘 다음을 기다렸다.


신호등을 건너와 단지 내 상가에 있는 책방을 들렸다. 책장 가득 쏟아질듯한 책들이 천장까지 빼곡하게 이중 삼중으로 꽂혀 있었다. 오른쪽엔 순정 만화가 앞쪽엔 코믹물이 왼쪽엔 소설책이 뒤쪽엔 무협지가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나에게 안온함을 주곤 했다. 책방 아줌마와 수다를 떨고 새로 나온 책들을 들춰보고 그때 내가 가장 좋아하던 만화책을 보고 또 보았다. 호텔 아프리카이기도 하고, 소년탐정 김정일이기도 하고, 에반게이온이기도 했다.


책방 책등에는 빨간딱지나 파란딱지 노란딱지들이 붙어있었다. 18세 이상 관람가. 15세 이상 관람가. 청소년관람가.

그 딱지들 사이에 나는 애매하게 서 있었다. 여기로도 저기로도 가지 못한 채. 빨간딱지를 쳐다보며. 책방은 나의 상상력을 끌어올리는 장소였고. 아줌마는 내가 몇 시간씩 책방을 서성여도 아무 말 없이 내가 하고 싶은데로 내버려 두였다. 가끔 율무차 한잔을 내밀며.


엄마네 집 사거리에서는 긴 횡단보도가 놓여있다. 빨리 가야 시간 안에 건널 수 있는. 엄마에게 가는 길은 긴 횡단보도만큼이나 멀다. 엄마는 이제 나를 기다린다. 내가 간다고 하면 그 시간만큼은 나를 기다려준다. 금세 파란 등이 깜박인다. 뛰다시피 건너간다. 언제쯤 나만의 속도로 이 신호등을 건너갈 수 있을까.


바람이 등을 떠민다. 아직 눈이 녹지 않은 보도에 발이 자꾸 미끄러진다. 스케이트를 타듯 발을 바닥에 미끄러트려본다. 울퉁불퉁한 얼음이 발길을 더디게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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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