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 속의 안정감

익숙한 무언가에 한 번 더 시선이 갈 때

by 가담



등본상 타지 사람이 된 지
1년 6개월 동안,
별일 없으면
주말마다 성실하게
본가에 발 도장을 찍고 있다.


자취하고 있는 동네는
낯선 것들 투성이라 그런지,
곳곳마다 사소하지만
말할 거리가 있는
익숙한 동네에 있을 때
왠지 모를 안정감이 느껴진다.


그동안 미뤄뒀던 병원에 가려고
버스를 탈까 고민하다가,
우연히 고른 플레이리스트가
주말 낮 특유의 포근함을
극대화하는 바람에
걸어가고 싶어졌다.


집에서 한 3분 정도 걸으면
쌀가게 하나가 보이는데,
17년 정도 결근하지 않았던
슈크림을 닮은
리트리버 우수사원이
그날따라 안 보인다.


노래 두 곡이 끝날 때쯤
골목을 빠져나오면

작은 시장이 보이고,
야채가게 옆에 자주 가는 카페가
보여야 되는데...


카페가 있어야 할 자리에
웬 낯선 꼬치집이
대신 자리를 잡고 있다.


발음하기 어려운
피넛캬라멜라떼 덕분에
꽤 많이 모였을 것 같은
쿠폰이 생각나면서,
아무 잘못 없는 꼬치집이
괜히 미워 보인다.


사장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셨겠지만
커피를 주문하다가
발음이 꼬이는 날에는,
혼자 길을 걷다가
넘어진 사람처럼 창피해져서
혀에 힘을 주고 '피넛.캬라멜.라떼'라며
스타카토식으로 말했다.


어렵게 주문한
커피를 마시면서
하루는 책을 읽고,
또 다른 하루는
다이어리를 끄적거리며
쿠폰의 1/10씩 발자취를 남겼다.


지갑을 열어
그동안 모은 쿠폰을 보니
8개의 도장이 찍혀있었고,
남은 2개를 다 채우기까지
기다려주지 않은
매정한 꼬치집이 역시나 밉다.


다섯 번째 노래가 들릴 때쯤에는
한 건물이 통째로 사라지는데
걸리는 시간이
고작 일주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됐다.


대략 20분 동안 걸어 다니며
정들었던 공간들이
파뿌리가 뽑히듯
깔끔하게 사라진 모습을 보니
동네가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전과 똑같은 공간이지만
새로운 간판이 걸려있으니
처음 보는 사람처럼
어색하게 느껴져서,
반가운 얼굴을 찾듯이
괜히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쌀가게를 지나가는데
관자놀이 너머로
익숙한 슈크림 색 털 뭉치가
시야에 들어온다.


지나가는 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아도
어찌나 반갑고 안심이 되던지.


정확한 나이도 이름도
모르는 남의 집 멍멍이지만,
모든 게 변할 때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참 기특하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고스란히 있어주길 바라는 것은
조금 어려운 부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곁에 늘 있던
익숙한 무언가에
한 번 더 시선이 간다.


침대 위의 나무늘보 인형,
나의 첫 화분,
그리고 좁은 인맥을
이루고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얼굴들.


안심되는 것을 보니
아직은 여전히
가까이 있나 보다.


다가올 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쭈욱,
단지 옆에 있어주기를.


혹시 슈크림 강아지에게
나도 그런 존재일까
기대해 보며
항상 그랬듯 손을 흔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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