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여름과 가을

by 가담



말랑이와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는 중에
앞서가던 아저씨가 눈에 띈다.


아저씨가 발걸음을 멈추고
화단에 있는 나무를 향해 손을 뻗어
뭔지 모를 작은 알갱이를
뚝 따서 입으로 가져가는데,
맛이 별로였는지
입에 넣자마자 혀를 차며
다시 화단으로 던져버리신다.


아저씨의 반응을 보아하니
보통 맛이 없는 게 아닌 것 같은
저 작은 열매의 정체가 궁금해져서
나무 가까이로 가보니까,
아직 덜 익어 초록빛을 띄고 있는
작은 대추가 매달려있었다.


그리고 비가 시원하게 내린
한 주가 지나고 나서
다시 나무 옆을 지나가는데,
이제는 제법 대추 다운 색으로 물들었다.


달력을 보면 분명
공식적으로 가을이 온 지
한 달하고도 조금이 넘었지만,
여전히 더운 날씨 탓에
계절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가 내리고 나서
변화의 신호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뜨거운 햇빛을 따라
내 키보다 훨씬 높이 자란
해바라기의 잎은 검게 쪼그라들었고,
밤새도록 열심히 일하던 선풍기는
더 이상 야근을 하지 않아도 되며,
밤낮 할 것 없이 시끄럽게 울던 매미는
어느새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 대신 안 그래도 높았는데
더 높아져 버린 하늘과,
얇은 긴팔을 허용하는 선선한 새벽 공기,
그리고 잔잔하게 들려오는
귀뚜라미와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자리를 대신 채운다.


다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놀이터 옆에 펼쳐진 보랏빛 꽃밭이다.


여름의 어느 순간부터 자리 잡고 있던
꽃범의꼬리라는 꽃은
제법 쌀쌀해진 날씨를 못 이기고
떨어진 몇 개의 낙엽 가운데
상처 하나 없이 화려하게 피어있다.


어떤 꽃인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피는
야생화라고 하는데,
서서히 다가오는 가을 속에서
여름의 잔여물을 발견해서인지
여름과 가을 중간쯤인
지금의 좌표를 생각해 보게 된다.


누구는 반팔을 입고
누구는 긴팔을 입는
제각각인 요즘이
새삼스럽게 이해가 갔다.


9월의 끝자락인 지금,
머지않아 보라색 잎이 다 떨어지면
여름의 흔적은 완전히 없어질 것 같다.


그때쯤이면 대추가 달달해져서
아저씨뿐만 아니라
동네 어르신들도
나무 밑에서 만나지 않을까 싶다.


유독 더운 여름이었으니
이번 가을은 천천히
흔적을 남겨주기를,
그리고 무탈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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