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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마야 Dec 30. 2022

금쪽이가 금쪽이를 낳다  

'아빠'라는 소리 정리하기(3)

아빠는 목회자의 길을 선택했고,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아빠의 백여만 원 돈의 월급으로 네 식구가 살았고, 그마저도 받지 못한 적도 있었다. 부부싸움의 주제는 거의 돈이었다. 그리고 아빠가 교회를 옮길 때마다 이사와 전학을 가야 했고, 난 초등학생 때만 무려 5개의 학교를 다녔다. 우리 집은 항상 불안했고 궁핍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했고 타인에게 잘 보이느라 웃고 다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부목사로 여러 교회를 전전하던 아빠가 담임목사로 발령 났다. 그렇게 네 식구가 새로 정착하게 된 곳은 충청도 어느 시골마을이었다. 시내로 나가려면 2시간에 한번 있는 시골버스를 1시간을 타야 하는 그런 깡촌이었다. 아빠는 담임목사로 일하게 되어 교회 모든 설교를 담당하게 됐고, 나는 목회자 자녀로 교회사람들의 많은 관심과 시선을 받았다. 담임목사가 되었지만 아빠의 월급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빠는 담임목사로, 엄마는 사모로 붙어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싸움도 잦아졌다. 수많은 싸움이 있었고 폭력이 있었다.


그러던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나는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내가 화장하고 치마를 줄이고 공부 안 하는 불량학생처럼 군다는 이유로 엄마와의 갈등이 심해진 어느 날. 나는 이곳이 지긋지긋하다며 서울 외할머니 집으로 가서 살겠다고 소리쳤다. 난 충청도 어느 시골마을에 아빠, 엄마, 남동생을 두고 서울로 전학을 갔다. 그리고 2년 뒤 엄마마저도 남동생을 데리고 그곳을 떠나왔다.


서울 외할머니 집으로 오고서부터는 아빠와의 마찰이 줄어들었다. 아빠라는 사람을 내 인생에서 지워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워가다가 성인이 된 어느 날 절교선언을 했고 관계를 끝냈다. 관계를 끝냈지만 불쑥불쑥 불안과 분노가 튀어나왔고, 아빠와 닮은 사람을 볼 때면 반항심이 들었다.


아빠는 나에게 어떤 사람이었던가 곰곰이 생각할수록 더 어렵고 도무지 정의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날 아프게 했으며, 아픔을 안고 자라 불안하고 부정적인 어른으로 크게 했으며, 날 낳기로 한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지 않았는지 멱살을 잡고 흔들며 물어보고 싶었다.


내가 아빠 기억 때문에 힘들어할 때면 외할머니는 늘 이렇게 말했다.


"있는 복 잡아, 세상에는 아빠 없는 사람도 있어. 근데 아빠가 살아있기라도 하잖아. 그냥 이럴 땐 이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맘 편해"


아빠 없는 사람을 생각하며 위안을 얻으라는 할머니의 말. 위안보다 오히려 분노 한 스푼이 더 얹어졌다.

'진짜 없었다면 난 한부모 혜택이라도 봤겠지, 그리움의 대상이라도 됐겠지, 끔찍한 기억 하나쯤은 덜었겠지'라며.

난 아빠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아빠가 있는데 없다고도 칠 수 없다.


나의 아빠는 아직 충청도 시골 어느 곳에서 부인, 자식과 소통을 끊고 살고 있다.

폭력적인 증조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폭력적인 친할아버지 밑에서 폭력적인 아빠가 자랐고, 미처 성숙해지지 못한 채로 나를 낳았다. 그렇게 금쪽이가 금쪽이를 낳고 자신의 아버지와 같이 폭력을 휘둘렀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채로 자라 자식에게 사랑을 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상처는 대물림 됐고, 나로부터 그것들을 끊어내게 될 거다. 나는 무럭무럭 자라 큰 나무가 될 거고, 내 안에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 채울 것이다.

사막에서도 나무가 자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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