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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마야 Jan 02. 2023

혼돈의 도가니탕

'엄마'라는 소리 정리하기(1)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나를 낳아 키웠다는 사실이 참 아찔하다.

자신의 손으로 십원 한 장 벌어보지 못한, 대학을 갓 졸업한 모태솔로 여자애가 애를 낳아 길렀다. 

세상이라곤 교회와 집 밖에 모르는 여자애가 그토록 괴팍한 성격의 아이러니한 아빠를 만나 결혼했으니 매 순간이 혼돈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혼돈 속에 자랐다. 나 초등학생 때까지의 엄마를 생각해보면 여러 느낌의 엄마가 생각난다. 



느낌 짚기 1. 친구 같음 

엄마는 혼돈 속에도 우리 남매를 데리고 잘 놀아주었다. 그 이유가 모성애든, 너무 일찍 결혼한 탓에 순식간에 청춘이 사라져 버려 어린애들이라도 데리고 놀아야 숨이 트였던 것이든.

엄마는 우리 남매를 산과 바다로, 각 지역의 어린이 체험 현장으로 데리고 다녀주었다는 건 사실이다. 당시에는 엄마가 운전을 하지 못해서 어린 남매를 데리고 지하철과 버스를 환승하면서 꽤 빨빨거리며 다녔었다.  

어릴 적 엄마와 함께한 놀이와 체험은 재미있었다. 아빠가 백여만 원 월급을 그마저도 받지 못하던 시절, 엄마와 집안에 숨은 동전 찾는 것도 재미있었다. 집에는 먹을게 딱히 없었고 떡볶이가 먹고 싶었던 돈 없는 우리(엄마, 나, 동생)는 침대밑, 옷 주머니, 서랍 등등을 뒤져 5천 원을 만들어내고 신나 했다. 그 길로 집 앞 시장으로 가 떡볶이를 신나게 사 먹었다. 엄마는 친구였다. 


느낌 짚기 2. 가시 같음 

엄마는 표정에 기분이 잘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기분이 상할 때면 미간의 주름이 팍 찌푸려졌다. 엄마의 미간 주름을 구기는 대부분의 이유는 아빠였고, 가난이었고, 교회였다. 

엄마는 교회를 다녀오면, 명절이 되면, 아빠와 조금이라도 말을 섞으면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그럴 때면 항상 '니아빠는' 또는 '박 씨 집안사람들은'이라는 말로 운을 떼며 신경질적인 한탄이 시작됐다. 나를 향한 직접적인 가시 돋친 말은 아니었지만 괜스레 내가 잘못한 것처럼 멋쩍어지는 순간이었다. 

아빠라는 키워드와 돈이라는 키워드가 합쳐지면 그날 엄마의 신경은 하늘을 찔렀다. 그럼 난 어렸을 적부터 터득한 애써 모른 체하기 스킬을 쓰며 엄마의 눈치를 봤다. 

어느 날 상가 유리판매점의 크리스털 장식품을 동생이 실수로 건드려 떨어트렸고, 직원과의 언쟁 끝에 엄마는 그걸 변상하게 됐다. 당시 몇만 원은 우리에게 큰돈이었고, 엄마는 쓸데없는 크리스털 장식품을 큰돈을 주고 구매했다. 그리고 상가 입구에서 엄마는 화내며 장식품을 바닥에 수차례 내던졌다. 몇 번의 내던짐에 크리스털 장식품은 여러 조각의 파편으로 깨졌다. 나는 가깝지만 멀리 떨어져 엄마의 화가 사그라드는 걸 기다렸다. 


느낌 짚기 3. 잘 보여야 함 

피아노학원, 성악학원, 미술학원, 웅변학원, 영어학원, 수학학원, 종합학원, 방과후학교 등등 나 어릴 적 엄마는 없는 살림에 나를 학원에 많이 보냈다. 그리고 방학만 되면 엄마는 초등학교 방학숙제에 혈안이었다. 독후감과 일기를 꼬박꼬박 작성하게 했고, 방학숙제 창작물 제출을 위해 미니어처 집을 엄마가 손수 만들었다. 엄마 덕에 난 방학이 끝나면 항상 방학숙제 상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학교 그림 그리기 대회, 발표대회, 합창대회 등등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고, 난 교내 상장을 싹쓸이했다. 초등학교 5개를 다니며 받은 상장은 앨범 여러 개를 꽉 채웠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성격에 초등학교 6년 내내 반장을 도맡아 했다. 남들이 봤을 때 나는 활발한 성격을 가진 모범생이었다. 나는 공부를 못하면 안 됐지만 아쉽게도 잘하진 못했다. 그래서 나는 여러 번 성적표를 고쳐 엄마를 주었다. 매번 걸려 뒤지게 혼났지만.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 속상한 마음보다 엄마가 실망할 것이 무서웠다. 



나 초등학생 때까지의 엄마를 생각했을 때는 이렇게 3가지의 느낌이 든다. 친구 같고 가시 같은 엄마에게 나는 잘 보이고 싶었고, 나는 아빠와 똑같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 중학교 때 이후로 완전히 달라졌지만. 


중학생 때부터 나는 공부를 놓았고 잘 보이려 하지 않았다. 서울 외할머니집에 정착했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담배피며 늦은 밤까지 함께 몰려다녔다. 엄마가 가시를 보이면 나 또한 가시를 세웠고 가시를 박기도 했다. 

잘 안 보여도 돼서 편했고, 화장하고 짧은 치마 입고 친구와 몰려다니는 게 재미있었다. 엄마는 학교에 불려 갔고, 외할머니와 나로 인해 마찰이 생겼다. 나에 대한 기대를 중학생 때 접게 해서 그런지, 고등학생 때부터 점점 조용해졌다. 성적표를 갖다 주지 않아도 궁금해하지 않았고, 화장을 해도 그러려니 했다. 그렇게 성인이 됐다.


엄마는 종종 이때 이야기를 꺼내며 지옥같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난 그때마다 미안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나게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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