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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마야 Jan 02. 2023

103호의 여자들

'엄마'라는 소리 정리하기(2)

외할머니집에는 엄마와 내가 얹혀살고 있다. 그렇게 103호에는 나와 엄마, 엄마의 엄마가 살고 있다.

엄마는 내가 어릴 적부터 나에게 본인의 감정을 쏟아내곤 했다. 그리고 할머니와 같이 지내고나서부터는 본인의 엄마에 대한 분노와 서운함을 나에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익혀온 '엄마 공감해주기 스킬', '한탄 들어주기 스킬'을 쓰며 엄마의 숨구멍 역할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쯤부턴가 내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엄마는 세상의 많은 것들을 미워했다.

목회자 가정의 희생을 필수로 하는 교회를 미워했다. 희생을 감수하고 품어줘도 떠나가는 교인들을 미워했다. 자신을 교회와 집 말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양으로 키운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미워했다.

따뜻하게 품어주지 않은 할머니를 미워했다.

자신과 자식들에게 폭력을 가한 사랑 없는 남편을, 박 씨 집안사람들을 미워했다.

여러 이유로 자신의 부모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미워했고, 원망했고, 불평했다.


엄마는 할머니와 같이 살며, 할머니에 대한 원망과 서운함이 더욱 커졌고, 감정은 날 선 말투와 행동이 되어 할머니와의 마찰이 심해졌다. 엄마와 할머니는 조금만 이야기해도 다투기 십상이었다.

할머니는 날 선 엄마대신 나를 선택해 미처 엄마에게 서운한 것들을 나한테 말하기 시작했고, 엄마는 나에게 매번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부모에 대한 원망을 토해냈다. 그렇게 103호의 여자들은 나에게 토해내기 시작했다.


"내가 너니까 이런 말 하지, 누구한테 하겠니" 라며.


엄마의 미워하는 마음과 부정적인 감정을 먹고 자랐는지, 나도 세상의 많은 것들이 미워졌다. 특히 엄마가 미워졌다. 엄마는 자신이 힘들 때 따뜻한 말로 위로 한번 해주지 않고, 냉철하게 질책하는 할머니가 원망스럽다고 했다.


웃겨 정말.

정작 엄마도 똑같은데, 똑같은 이유로 할머니가 밉다고 한다.


중고등학생 때 공부를 놓아서 나는 공부할 것이 많은 성인이 됐고, 삼수에 편입을 거쳐 내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 졸업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나는 남들보다 조금 더 간절했고 열심히였다. 노력한 덕분에 내가 학과 1등으로 졸업발표 오프닝을 서게 됐다. 가족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오는 자리라서, 완벽하고 싶은 마음에 남들보다 준비를 몇 배는 더 했다. 야속하게도 ppt를 넘겨주던 친구가 긴장한 나머지 실수를 했고, 순간 3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무사히 발표를 마무리하고 박수를 받았지만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맴돌았다.

'아 망했다'

졸업발표가 끝나고 모두가 팡파레를 울릴 때 난 완벽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앞서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로비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고, 난 눈물을 닦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다가가 물었다.


"아까 ppt 넘겨주던 친구가 긴장해서 3초 정도 멈칫했는데 괜찮았어? 많이 티 났지?"

(실수해도 괜찮다고 말해줘, 누구보다 내가 잘했다고 그동안 고생했다고 말해줘)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정말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런 상황이었으면 화면이 먼저 넘어갔다고 말하면서 위트 있게 말했어야지. 순간 대사 까먹었나 싶었지"

 

그날 졸업발표 뒤풀이에서 난 술을 진탕 먹고 울었다. 그동안 고생했던 것을 곱씹으며 기뻐하고 축하해야 하는 자리가, 내 덕분에 위로의 자리가 되어 버렸다. 다음날 아침, 난 술이 덜 깬 채로 엄마방문을 벌컥 열고 울분을 쏟아냈다. 엄마 때문에 난 그 3초를 평생 후회하며 살게 될 거라고, 말을 왜 그렇게 하냐고 있는 힘껏 쏟았다. 아파하는 딸의 모습에 슬퍼할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은 처절하게 빗나갔다. 엄마 반응은 너무나도 심플했다. 뭘 그런 일로 이렇게 유난을 떠냐는 듯. 그럴 의도가 아니었고 네가 티 많이 났냐고 물어봐서 대답한 거다. 나는 울고불고 악을 쓰며 결국 사과를 받아냈지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엄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무슨 일이 일어났냐는 듯,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나에게 자신의 부모에 대한 분노와 서운함을 나에게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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