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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마야 Jan 03. 2023

엄마를 고발한다

'엄마'라는 소리 정리하기(4)

퇴사하면 이 정체 모를 불편한 감정에서 해방될 줄 알았다. 생각할 시간이 많아진 탓에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껴안고 놀지도 쉬지도 못한 채 시간이 지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정적인 감정은 너무나도 커져버렸다. 나는 모든 사람을 갖가지 이유로 미워하며, 매일밤마다 한 사람씩 내 상상 속으로 불러와서 혼자 증오하고 용서하고를 반복했다. 특히나 엄마가 가장 미워졌다.


악으로 깡으로 약 3년 다닌 첫 직장을 퇴사하는 날,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엄마한테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5시까지 고속터미널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고, 나는 엄마에게 백화점에서 작은 가방하나 사주려고 했다. 예상치 못하게 회사에서 나오는데 너무 오래 걸렸고, 엄마는 약속장소에서 약 1시간 정도 나를 기다렸다. 설상가상으로 백화점 휴무일이었다. 평소 백화점을 다니지 않아서 휴무가 있는지도 몰랐다. 아쉬운 대로 그간 엄마에게 필요했던 것들을 사주기로 했다. 잠바, 티셔츠, 화장품, 핸드크림 등등.

엄마에게 필요한 것 갖고 싶은 것 다 고르라며 신나게 카드를 긁었다. 우리는 양손 가득 쇼핑을 하고 배불리 먹고 택시 타고 집에 왔다. 나는 엄마에게 효도할 돈을 마련해 두었으니, 어디로 놀러 가고 싶은지 정하라고 했다. 집에 도착해서 방에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들어와 장난스러운 얼굴로 퇴사 선물이라며 무언가를 주었다. 어느 아기 생일기념으로 주변인들에게 나눠주었던 비누였다. 비누에는 얼굴도 모르는 아기의 일을 축하한다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엄마는 별뜻 없는 장난이었다.


뭔지 모를 불편한 감정이 솟구쳤다.


그날밤 나는 내 상상 속에 엄마를 불러와 증오하고 용서하고 또 증오하기 시작했다. 퇴사 축하한다, 그간 수고 많았다, 기념으로 밥 한 끼 사주겠다는 말은커녕. 왜 나에게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매일 나는 엄마를 향해 속으로 그간의 감정을 꺼내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평소처럼 나에게 본인의 감정을 토해내고, 투덜거렸다. 그리고 나를 딸로, 인격체로 생각하긴 하는 건지 정체 모를 이상한 상처되는 말을 툭툭 뱉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겠지만, 내가 지금 기억나는 대로 엄마를 고발한다.




● 고 발 장

고발인: 해 마 야 (103호 거주)
피고발인: 김 엄 마 (103호 거주)

- 고발사실 -
1. 나에게 자살하고 싶다, 하려고 했다, 생각하고 있다는 식의 말을 했음
-본인은 내가 학창 시절 때 속 썩여서 힘들어서 그런 거라고 함
2. 자식 낳으면 발목 잡힌다, 자식 낳지 마라 라는 말을 했음
-특히 같이 tv육아프로그램 같은 걸 보며 그랬음
3. 할머니, 할아버지가 교회를 개척하며 자신 앞에서 말다툼을 많이 했다고, 가정폭력이라고 투덜댐
-엄마, 아빠가 몇 배는 더 심했음. 그래도 할아버진 폭력은 사용하지 않음
4. 돈 많은 친구, 돈 걱정 없는 사람들 등등 신세한탄함
5. 같이 밥 먹으러 가면 내가 계산하기 전까지 가만히 있음, 식당 편한 자리는 무조건 본인 거임
6. 답은 정해져 있고 나는 대답만 하면 됨
7. 나한테 답답한 거 고민 등등 다 토해내면서, 정작 내가 말하면 "너는 어려서 몰라"라고 함
8. 사소한 거 하나부터 열까지 지적함
ex)할아버지 생신 때 동영상으로 찍고 싶어서 찍었는데, 왜 사진으로 안 찍냐고 뭐라 함
    같이 식당 가서 자리에 앉는데, 왜 거기 앉냐고 뭐라 함
    내가 뭘 먹으면 그런 걸 왜 먹냐고 함
9. 이태원참사 때, 나도 이태원 가려다가 안 갔다고 하니까 "거기 가서 죽으면 개죽음이지, 쪽팔려서 장례도 못 치러"라고 함
10. 내가 물건을 사면 "내 거는, 나는!"이라고 함
11. 내가 남자친구와 놀러 갔다 오거나 커플템을 맞추면 "내 거는, 나는!"이라고 함
12. 내가 친구들과 약속이 있거나 재미있는 곳 놀러 간다고 하면 또 왜 가냐고 함
13. 본인이 안 쓰는 커피쿠폰 나한테 주면서 "주세요~ 감사해요~고맙습니다~"라고 말하라고 함
14. 제 때 갚긴 하지만, 나한테 자꾸 돈 빌려달라고 함
15. 내가 이만큼 나 저축 잘하고 있다고 하니까 자신은 빚 갚느라 못 모았다고 한탄함
16. 할아버지가 사준 자동차면서, 내가 하루만 빌려달라고 하니까 사용료 내라고 함
17. 할머니, 할아버지가 너무 미련하게 재산을 챙기지 못했다고 한탄함
-정작 할머니, 할아버지는 엄마한테 물려줄 재산이라도 있는데도
18. 주어 동사 목적어 등등 다 빼먹고 본인식대로 말해놓고 내가 이해 못 하면 짜증냄
19. 나를 성악가, 음악가로 만들고 싶었는데 내가 하기 싫어했다고 아쉽다고 함
20. 어릴 때 내가 쓸 돈이 없다고 하면 미간 찌푸리면서 한숨 쉬며 짜증 낼 땐 언제고, 나한테 돈 빌리려고 운 떼는 말이 "너 여유 있어? 부자야, 거지야?"라고 함
21. 퇴사하고 엄마 선물 사주고, 호캉스 데려가고, 밖에 나갈 때면 엄마 먹을 것 한 개씩 사 오는데, 엄마는 6개나 있는 핸드크림 하나 주기 싫다고 함
22. 자신에게 엄마가(할머니) 다정하고 따뜻하지 않았다고 투덜댐
-엄마도 나한테 따뜻하지 않다고 하니까, 자기는 어릴 적 잘 놀아주지 않았냐며, 이야기 잘 들어주지 않냐면서, 자신은 다르다고 짜증냄

(이하 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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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다 못썼다. 아직 고발할 것이 남아 있다.

모조리 고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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