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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마야 Jan 08. 2023

엄마여행 주의보

'엄마'라는 소리 정리하기(5)

엄마와의 여행이 마냥 편하고 재미있으리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었다. 크나큰 실수였다.


퇴사 후 엄마에게 여행을 선물하고 싶어 여행자금을 마련해 두었다. 엄마는 여러 여행지 중에 전주를 선택했고, 우리는 주말 아침 일찍 전주를 향해 떠났다. 전주에 도착할 무렵 전주 폭설주의보가 떴다. 호텔 앞에 다다랐을 때는 눈발이 거세졌고,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눈이 내렸다.

전국에서 딱 우리가 있는 전주에만 눈이 내렸다. 졸지에 호텔에 고립되었다.

호텔 로비에서 찍은 바깥풍경

왜인지는 모르겠다만, 퇴사하면 엄마에게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친구들이나 남자친구와 놀러 다녀올 때면 엄마는 장난+툴툴거리는 말투로 '신났네, 좋겠네, 또 어딜 다녀오냐, 왜 가냐'라고 했고, 난 입버릇처럼 퇴사하면 같이 좋은 데 갔다 오자라고 했기 때문인가. 무튼 퇴사하면 엄마한테 좋은 거 좋은 곳 맛있는 것 사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1박에 40만 원 하는 호텔을 과감히 질렀다.


엄마와 나는 폭설을 뚫고 밖에 나가 한옥마을을 구경했고 길거리 음식을 사 먹었다. 엄마는 그날밤 거품목욕으로 기분을 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몸이 피곤했는지 구순염이 돋았다. 립밤을 발라도 따끔거리는 탓에 짜증이 났다. 그리고 속에 있는 엄마를 향한 짜증도 솟구치기 시작했다. 왜 나만 엄마를 생각해야 하며, 내가 마치 보호자처럼 엄마를 챙겨야 하는지 짜증 났다. 식당 예약하기, 편한 자리, 물 떠 오기, 수저 놓기, 주문하기, 계산하기는 모두 다 내 몫이어야 하는지 치사해졌다. 어느 한옥집 앞에 걸린 가야금을 보고 뱉었던 엄마의 말 한마디마저도 짜증이 났다. "너 어릴 적 전통음악 시키려고 했는데 네가 죽어도 싫다고 했었어, 전통음악 얼마나 멋있는데"


그리고 별것도 아닌 걸로 말버릇처럼 투덜거리는 것도 짜증 났다.

(날씨가 추우면) 아 추워, 너무 추워, 추워 추워, 아휴 너무 춥다 x100

(배부르면) 아 배불러, 아유 너무 배불러, 배불러 배불러 x100

(사람이 많으면) 아 사람이 너무 많아, 다들 어디서 오는 거야, 아유 왜 이렇게 많아 x100

(음식이 뜨거우면) 아유 뜨거워, 뜨거워, 아 뜨거워 x100


그냥 하는 말이겠지만, 가는 곳마다 본인의 상태를 계속 반복해서 투덜거리듯 말하는 엄마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결국 여행 마지막에 가서 나는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재미있는 곳을 찾고 싶지도, 가고 싶지도 않고 어서 빨리 집에 가서 눕고 싶어 졌다. 그렇게 엄마와 전주여행을 다녀오고 주의보가 켜졌다.


여행을 다녀온 다음날, 볼일 보러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있는 빵집을 보고 엄마가 생각나 빵을 사 와 엄마 방에 두었다. 엄마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 방에 들어갔고, 빵 맛이 궁금해 엄마방에 들어갔다.

엄마는 퇴근하면 항상 녹초가 돼서 피곤해했다. 어김없이 엄마는 몸이 고된지 침대에 누워있었고, 빵 맛이 어떻냐는 내 질문에 아직 먹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방을 나가려는 찰나에 엄마 화장대에 놓인 쇼핑백을 발견했고, 안을 들여다보니 핸드크림 6개가 있었다. 한 개만 달라고 하는 내 말에 엄마는 거절했다.


"어? 핸드크림이네? 나 하나만"

"그거 어린이집에서 학부모가 준거야" (엄마는 어린이집 교사다)

"응 이거 핸드크림이야, 6개 들어있어, 나 하나만 줘"

"놓고 나가, 선물준거라니까"

"주기 싫다는 거야?"

"놓고 나가라니까? 피곤해 나가, 나가!"

"이거 6개 있는 건데 나 하나 못준다는 거지?"

"피곤하다니까? 나가라고 나가! 너 회사 다닐 때 방에 들어가면 너도 피곤하다고 나가라고 하잖아. 나가!"  


솔직히 핸드크림은 굳이 없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피곤해서 주지 않겠다고 하는 엄마가 이해가지 않았고 오기가 생겼다. 핸드크림 그거 하나 뭐길래, 난 엄마한테 좋은 것 계속해서 줘야 하고 챙겨야 한다는 압박을 갖고 있는데. 억울하고, 치사하고, 분하고, 서운했다. 끝내 엄마는 나에게 핸드크림을 주지 않았고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제 우리 관계는 끝이라는 선언과 함께, 나는 마치 꼬장 부리는 전애인처럼 엄마에게 사줬던 것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커다란 봉투에 주워 담아 내다 버렸다. 그리고 절교 선언 카톡을 날렸다. 날 선 감정을 꾹꾹 눌러 담담하게 적었다. 엄마의 감정쓰레기통으로 살아온 억울함과 분노를 담아 어쭙잖은 효도를 중단하겠다는, 그래서 날 딸이라고 생각했는진 모르겠지만 딸 하나 없는 셈 치라는 메시지였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감정인지모를 날 선 감정은 퇴사 이후 일파만파 커지더니, 여행을 기점으로 흘러넘쳤다.

엄마와의 여행은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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