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사계 - 봄 (꽃을 피우려면 추운 겨울을 지나지)
열심히 앞만 보며 달리다 문득. 도대체 이게 무언가라는 의문과 함께.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쏟아져 나왔다. 애써 쌓은 돌탑 무너지듯.
가만가만 둘러보니 너무 차갑다. 숫자를 본다는 미명하에.
아니지 그래도 사람이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인간적으로 이건 아니지 싶은데.
23년부터 2년여간 고군분투하며 많은 일은 한 것 같았지만 사실 별로 남은 게 없습니다. 어떤 위대한 성과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뒤에 남는 씁쓸한 뒷맛은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합리화라는 명목하에 단행했던 모든 결정들이 옳았는지도 의문스럽습니다.
다만, 적자의 폭이 조금 줄어들었고, 대부분 의아하게 생각하는 잘못된 관행 몇 가지만 고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늘어가던 적자의 폭이 줄고 주요 팀장들이 교체되면서 생긴 리프레시 효과로 사업부의 분위기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뭐가 나아졌냐구요?
그러게요. 이 부분이 제 가슴속 텅 빈 느낌의 주요 원인인 것 같습니다. 한참 바꾸고 고치고 노력했는데 '그래서 뭐?'라고 하면 딱히 할 말이 없습니다. 누가 알아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제 자신이 납득이 안 가서 그런 겁니다. 물론 다른 사람, 특히 윗분들이 저의 노고를 알아주시고 하는 건 반가운 일이겠지만, 저는 제 자신의 인정을 더 갈구하고 있었나 봅니다. 제가 원하는 대로 방향을 잡고 끌어 왔는데 이 길이 맞는 건지 확신이 가지 않는 난감한 상황에 봉착했습니다. 다시 또 방황이 필요한 시간인가 봅니다.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고 동의를 얻어내서 실행하고 결과를 확인하는 이 일련의 과정이 왠지 좋았습니다. 마치 뭐나 되는 양 여기저기 칼질을 하는 것에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나름 쾌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조금 과장하면 일제강점기의 완장 찬 앞잡이 정도가 되어 밀고하고 잡아 가두고 하며 경찰놀이를 너무 진지하게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허탈감이 밀려옵니다. 조직 논리라는 미명하에 떠난 분들에게 잠시 머리 숙여 미안한 마음을 표해 봅니다. 무언가를 바꿔나가는, 특히나 빠른 시간 내에 이뤄지는 그 과정에서 원치 않는 피해를 보기도 하고, 낙인이 찍히기도 하고, 쫓겨나기도 하는 이들의 필수적인 희생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혼란스럽습니다. 그저 정리를 위한 정리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마저 드는 요즘입니다.
물론 저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다만 기존보다는 좀 더 '숫자'보다 '인간'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품고 접근하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온정주의에 기대어 두리뭉실하게 일을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홀로 외롭기도 하지만, 이 또한 내 삶의 일부이기에 겸허히 받아들이고 짊어지되 그 과정에서, 산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처럼 더 낮은 자세로 임하려고 합니다.
직장에서의 일들이 제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움직이려 하며, 궁극적으로 이런 배움들을 통해 세상에 다른 방식으로도 기여할 수 있도록, 제 인생의 후반전을 살 수 있는 준비를 하려 합니다. 뭐 당장 이직을 준비하거나 하겠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인연이 닿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제게 주어진 그 시간들에 충실하며 살고자 하는 것이며, 일과 병행하여 제가 꿈꾸는 작가로서의 삶, 엉뚱한 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괴짜 노인으로서의 삶을 준비하는 시간들을 갖고자 합니다. 제 발길이 저를 어디로 인도할지는 세상 누구도 모르겠지만, 알지 못하기에 더 재미있는 이 삶을 넉넉하게 즐겨보려 합니다.